잃어버린 만주, 남겨진 교훈

by 방구석 정치



1. 서론: 만주의 지정학적 중요성

역사적으로 만주는 동북아 패권을 좌우하는 열쇠였다. 만주를 장악한 세력은 언제나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만주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맞부딪히는 전략적 교차로였다. 쉽게 말해, 대륙 세력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자, 해양 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그래서 만주가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동북아 전체의 세력 균형이 요동쳤다. “만주를 장악한 자가 곧 패권을 장악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역사적 사례를 보더라도 이 사실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만주를 근거지로 삼아 중국 왕조와 대등하게 맞서며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했다. 발해는 만주 지배를 바탕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국제적 위상을 확보했다. 몽골 제국 또한 만주를 발판으로 중국을 지배하고 한반도와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동북아 패권은 일본으로 이동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만주 지역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구려와 발해: 만주가 중심 무대였다

고대에는 만주가 우리 민족의 심장부이자 세력 확장의 무대였다. 고구려는 졸본(지금의 요령성 환인 일대)에서 출발해 국내성(집안 지역)과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발전했지만, 그 근간은 언제나 만주에 있었다. 만주는 고구려가 동북아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었다.

특히 광개토왕(재위 391~413) 시기 고구려는 만주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도약했다. 그는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적 위상을 드러냈고, 만주를 거점으로 남쪽으로는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숙신(만주 동북부와 연해주 일대)과 거란(만주 서부와 내몽골 접경 지역)을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왜 세력을 격퇴했다. 광개토왕비문은 이러한 활약을 생생히 전하며, 만주가 고구려의 패권 장악에 얼마나 중요한 무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 고구려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 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만주는 다시 민족사의 중심 무대로 부상했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해 만주 동북부를 근거로 발해를 세웠다. 발해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며 해상 교역과 대륙 세력을 연결하는 교차로를 통제했다. 또한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자처하며 정통성을 세웠고, 당나라조차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부르며 국제적 위상을 인정했다.

결국 고구려와 발해 시기는 만주가 단순한 국경 지역이 아니라 민족의 터전이자, 동북아 패권 경쟁에서 우리 민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핵심 무대였음을 잘 보여준다.


3. 통일신라: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통일과 북진의 좌절

통일신라는 삼국을 하나로 묶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그 과정에서 당나라와 손잡고 무력을 사용한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자주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당의 간섭을 불러왔고, 한반도 북부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내부적으로도 고구려·백제 유민의 반발과 지역 갈등이 깊어졌다. 당의 지원은 단기적 승리를 보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외세 의존이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선택은 민족적 자존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뿐 아니라, 이후 당과의 사대 외교로 이어지며 북방 진출의 길을 스스로 차단했다. 결국 신라의 통일은 ‘완전한 자주 통일’이라기보다는 외세 개입 속에 이루어진 불완전한 통일이었으며, 이는 만주를 잃고 반도 국가로 한정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4. 고려: 고토 회복의 염원은 있으나 국력이 부족

고려는 건국 초부터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자처했다. 국호를 ‘고려’라 한 것부터가 그 의식을 드러낸 것이며, 왕건은 즉위 교서에서 “옛 고구려의 영토와 기상을 이어받겠다”는 뜻을 밝혔다. 왕건은 직접적인 고구려 혈통은 아니었으나, 고구려의 후예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고 국가 정통성을 확보했다. 발해와 직접적인 계승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발해 멸망 후 유민을 받아들이며 일정한 연대 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고구려 계승 의식은 단순한 상징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주와 요동을 향한 북진정책으로 이어졌다. 고려는 한반도 내부의 통합과 안정을 이룬 뒤, 잃어버린 고토 회복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의지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사례가 윤관의 별무반 조직과 동북 9성 설치였다. 여진족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 국경 일대를 위협하자, 고려는 윤관을 중심으로 귀족 자제, 승려, 농민까지 아우른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했다. 1107년 윤관은 대규모 원정을 단행해 여진을 격파하고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동북 9성을 설치했다. 이는 국경 방어를 위한 군사적 거점이었지만, 동시에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자처하며 북방 영토 회복 의지를 드러낸 상징적 행위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군사·재정적 부담이 커 불과 2년 만에 여진에게 반환해야 했고, 이 사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준다.

고려 말로 갈수록 이러한 북진정책의 이상은 점차 희미해졌다. 원·명의 교체기에 요동 정벌론이 잠시 제기되었으나, 이미 국력은 크게 소진되어 실질적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고려는 북진과 고토 회복의 염원은 간직했으나 그것을 실현할 국력이 부족했으며, 이는 한 번 만주를 잃으면 다시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5. 조선: 북진 포기의 제도화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부터 북진의 이상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 고려 말 최영이 추진한 요동 정벌은 비록 무모한 시도였지만,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을 돌려세운 위화도 회군(1388)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을 가르는 역사적 경계이자 북진 정책의 종언을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은 요동 정벌이나 만주 회복과 같은 적극적 북방 정책을 사실상 접고, 한반도 내부의 안정과 왕조 체제 수립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는 곧 북진 포기의 제도화라 불릴 만한 흐름이었다.

그 후 조선의 대외정책은 명과 청 같은 대륙 강대국에 대한 사대 외교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명과의 관계에서는 조공국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했지만, 후금(청)이 등장하면서 국경 충돌과 병자호란 같은 참혹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이후 조선은 더욱 강력하게 청에 대한 사대를 제도화하며 북방 진출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

이러한 흐름은 백두산 정계비(1712)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조선은 청과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에 경계를 세웠지만, 문제는 경계선의 기준으로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이 어디인지 불명확했다는 점이다. 이 애매한 표현은 훗날 간도 지역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되었고, 조선은 적극적으로 이 지역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채 청의 해석을 수용했다. 결국 간도는 청의 영역으로 사실상 편입되었고, 이는 조선이 만주에 대한 전략적 권리를 포기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결국 조선 시대는 북진의 열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한반도 내부의 안정과 체제 유지에 초점을 맞춘 시기로 요약된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제도화된 북진 포기의 흐름, 명·청과의 사대 외교,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문제 처리 과정을 통해 조선은 만주를 더 이상 자국의 전략적 목표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조선이 반도 국가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자, 후대에 뼈아픈 역사적 과제를 남긴 선택이었다.


6. 결론: 만주를 잃어버린 시대는 고난의 역사였다

만주를 포기한 것은 민족의 안전을 지키는 선택이 아니었다. 오히려 완충지대를 잃으면서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직접 충돌하는 최전선이 되었고, 그 결과 임진왜란·병자호란·한일합병·6·25 전쟁과 같은 끊임없는 외환을 감내해야 했다.

따라서 만주 상실은 단순한 영토 축소가 아니라 끝없는 고난을 자초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좁은 반도에 갇힌 지정학적 조건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제약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지정학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잃어버린 만주가 남긴 교훈은 미래를 위한 전략적 선택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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