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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May 13. 2018

인간의 농담

왜 사냐건, 웃지요

서양인들은 기본적으로 유머감각을 타고나는 건지, 해외의 다양한 유머 영상들을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 많다. 애초에 유머감각이 한국보다 이성적인 매력으로서 더 크게 어필되니, 사회적으로 그런 감각을 더 키워야 한다는 권장과 압박이 있을수도 있고.

참 재밌게 사는 사람들이다 싶었는데, 그 중에서도 미국인들은 가끔 미친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유머감각을 보여줄때가 있다.

 최근 발견한 것들 중 가장 쇼킹한 것이 바로 핵 미사일 격납고를 찍은 사진이었다.

격납고의 육중한 철문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도미노 피자 박스에 피자 대신 미니트맨 미사일이 그려져있고, 도미노의 캐치프레이즈 비슷한 것이 적혀있었다.

'전 세계 배달. 30분이나 그보다 더 빨리. 늦으면 공짜로 한발 더.'

처음 봤을 땐 지구 멸망과 현실적으로 가장 가까운 요소인 핵미사일을 유머 소재로 쓰는 미국인들은 도대체 정신머리가 어찌되어 있나 싶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유머가 허용되는 사회의 분위기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나라였다면 핵미사일을 가지고 어떻게 농담을 할 수 있냐 부터 시작해, 전쟁이 장난이냐는 둥 오만 비난이 빗발치지 않았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아직도 다양한 나라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중이고, 국방비에 쏟아붓는 예산도 어마어마해 천조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전쟁에 대해서라면 우리들보단 그네들이 더 프로페셔널할텐데.

그들이 과연 정말 전쟁과 폭력, 죽음이 하찮고 재미거리라서 그런 농담을 하는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건강한 정신의 발현이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혹은 두려움을 극복하려 할 때 발휘되는 것이 유머다. 두렵지 않거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의지와 대담함이 필요하고, 공포의 대상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꺾이지 않는 정신적 강함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까지 농담을 던지는 유쾌한 캐릭터를 우리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또한 유머는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웃음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대상의 권위가 나와 같거나 나보다 아래여야 한다. 만인지상이라는 왕이라도 광대놀음에서는 덜떨어지는 모질이가 되듯이, 대상을 내가 깔볼 수 있는 위치까지 끌어내리는 것이 유머다.

돈이나 명예, 지위 없이 상대방 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대상이 아닌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고차원적인 유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의 종교 경전들이 유머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애석하다.

하나님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잠시나마 그 전지전능한 존재보다 우월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신조차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한없이 연약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가끔' 신보다 우월할 수 있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라면, 번뇌를 구제해주는 신보다 잠깐 우월해 지는 것인 유머에도 뭔가 종교적인 이름이 붙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한없이 강력한, 신조차도 깔아뭉갤 수 있는 정신적 수단이 유머지만, 그렇기에 약자에 대한 유머가 더욱더 비겁한 행동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약자가 강자 위에 설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유머인데, 이미 우위를 가진 존재가 약자에게 행하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저급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유머는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 그러니까 풍부한 맥락과 비상한 재치, 빛나는 통찰과 저항의 의지가 동반될 때에만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과 폭력, 섭리를 우스개 소리로 받아칠 때, 한차원 높은 인간성의 발현을 발견한다. 최후의 최후까지 굴복하지 않는, 꺾을 수 없는 존엄한 의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바라는 죽음의 모습을 상상할 때, 아무도 없는 들 한복판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고 숨이 막히게 웃다가 죽었으면 좋겠구나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나만의 죽음을 위해서.

아마도 그것은 죽음에 대한 농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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