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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Jan 06. 2019

껍질 깨기

아브락사스와는 크게 관계없는 이야기


나는 그렇게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부르는 쪽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고, 요즈음은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번 마음에 든 노래는 진득하게 듣는 데다 취향도 확고한 편이지만, 음악을 켜고 이어폰을 꽂는 그 과정이 귀찮은 것이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다른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큼 집중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결국 나의 음악생활은 푹 빠져 듣는 것과 멀리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즉 상대적으로 의존도가 일정치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하나의 기호품이었지, 나에게 어떤 육체적, 정신적 변화를 불러오는 특별한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나는 그 생각을 바꿔버리는 체험을 해버렸다.
순례길을 떠나며 이어폰을 챙겨가긴 했지만, 10일 정도는 음악을 듣지 않았었다. 그냥 길을 걸으면서 인공적인 소리들 대신 온전히 지금을 체험하자. 뭐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로 향하는 코스를 걷는 날, 그날따라 너무 힘이 들었다. 그늘 하나 없는 평야와 쭉 이어진 지루한 밭길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언제 쉴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자극이 없는 생활 속에 더해지는 지루함은 의외로 체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인걸 그때 처음 알았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드셋을 낀 채 속보로 걷는 젊은 여성 순례객에게 뒤쳐지기 싫어, 조금 열심히 걸은 것을 제외하곤 내 컨디션은 지극히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해야겠다 싶어, 노래를 틀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음악은 단 한 번도 내 감정을 움직이지 못했었다는 걸 알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이어폰을 통해 뇌로 직접 아드레날린을 주사하는 느낌. 


몸을 움직여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때때로 과정 속에 존재하는 고통이 환희로 승화되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고통조차 몰입을 더해주는 마약처럼 작용하던 때를.


마치 곡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연주자가 몸과 마음을 하나로 엮어내며 흘려야 하는 땀처럼. 아니면 가장 격하고 정교한 안무를 소화해야 하는 부분의 무용가가 느끼는 긴장처럼. 혹은 기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손 끝 하나의 떨림도 없이 그려내고 있는 화가처럼. 그리고 시냅스와 뉴런들 사이의 불꽃 튀는 화학작용을 단어와 문장으로 엮어내 새로운 서사의 영역을 쌓아 올리는 작가처럼. 

그 순간에는 어떤 고통도 그들이 나타내는 결과물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스스로를 몰아붙여 육체와 정신 모두의 한계를 감당하면서도, 스스로가 내면의 불꽃을 세상 밖으로 떨쳐내며 피우는 아름다움에 전율하고 환호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이미 수없이 거쳐왔기 때문에.


형태는 다르지만 내가 느꼈던 그때의 음악들도 똑같았다. 손톱만 한 진동판을 타고 들어오는 멜로디와 리듬이 세상을 채우고, 내 몸이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잡음들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순간, 기이한 역전이 일어난다. 그 순간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괴로운 일이 아니게 된다. 가사와 멜로디가 전달해 주던 감정들이 스며들다 못해 넘치고, 내 움직임을 통해 거꾸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식이 한 번 뒤집히면 웬만해서는 걸음을 멈추기 힘들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드럼의 리듬에 맞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 허벅지 근육을 움직일 때 마치 드럼 소리가 나는 듯 한 착각이 든다. 그 위로 한층 한층씩 얹어지는 다양한 악기들에 나를 맞춰가다 보면, 온몸이 마치 한 그룹의 세션이라고 까지도 느낄 수 있다. 그 위에 화룡점정으로 보컬의 목소리와 가사, 감정이 끼얹어지면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힘들어진다.

그저 음악이 흘러가는 대로, 생각을 다 비워버린 채 감각만 남아 홀린 듯이 걸어갈 뿐이다. 아마 혈액 검사를 한다면 틀림없이 주사기에 피 대신 아드레날린이 뽑혀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그 이후로는 종종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싶을 때면, 감정을 폭발시키는 뮤지컬 음악 같은 걸 들으며 열심히 걷곤 했다. 체력을 정말 바닥까지 긁어다 쓰면 음악도 별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반대로 컨디션이 최상일 때는 속보로 20Km를 쉬지 않고 걸어 주파하기도 했다.

새삼 음악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싶기도 했고,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 가는 클럽이나 대규모 콘서트장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그보다 더 깊이 음악이 주는 환희와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지금 순례길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말해 보라면 주저 없이 음악을 들으며 걸었던 시간들을 꼽을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로 몰아넣고, 음악을 통해 또 다른 감정의 파도에 던져내던 일들.
그럴 땐 몸을 움직이는 아픔조차도 새로운 기쁨의 감각이 됐다.
허벅지가 아프면 아,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손목이 스틱 줄에 쓸릴 때면 나는 내 손목의 위치를, 나의 범위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경계를 부분부분 재발견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기꺼이 선택한 어려움 속에서,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존재하는지 샅샅이 찾아냈던 기억들이야 말로 내가 그 긴 여정을 지나치며 얻은 가장 값진 기억이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 외에는, 순례길을 통틀어 그 정도의 환희를 느낄 일은 딱히 없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리고 세계의 끝이라는 피스테라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고 일몰을 볼 때도. 이미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쁨보다 더 큰 것을 과정 속에서 충분히 발견하고 체험해 왔기 때문에. 


애초에 순례라는 것이 그렇다. 목적지, 성지인 산티아고에 도달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성지에 도착하는 것만이 순례의 목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하나의 열망을 품고, 길 위를 걷는 모든 과정에 몸과 마음을 쏟아 온전히 자신을 바쳐가며 걷기에 순례자, 순례길이 아직도 의미를 갖고 남아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음악이라는 수단을 통해 과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기쁨들 중 하나를 발견했지만, 수많은 다른 순례자들은 지금도 그 여정을 온전히 경험해야 발견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쁨을 길 위에서 찾아나가고 있을 것이다. 혹은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성취가 또 다른 보상이 될 테고.

그리고 기꺼이 감내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자신 안의 빛나는 순간을 찾아낸 사람들이 새로운 또 하나의 성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겠지.


지금도 가끔 그때 들었던 음악들을 듣거나, 길을 걸으며, 카페에서 가끔 마주치곤 한다.
하지만 순례길 위에서와 같은 감동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내 몸과 정신은 지극히 편안하고, 아무런 고통도 감수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는 언젠가 또다시 기꺼이 그 고통을 찾아 길을 걸을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몰아붙이고, 부수고, 그리고 그 떨림에 나를 맞춰가면서. 나조차 알지 못하는, 인식밖에 존재하는 무형의 껍질을 깨버릴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 파편 속에서 새로운 빛을 찾아 내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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