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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Jan 06. 2019

매일의 빨래

세탁객(客)의 변

순례길을 걸을 땐 다음날의 일정에 차질을 주지 않기 위해 매일 빼먹지 말고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빨래다.
알다시피 7~8킬로그램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하루 6~10시간 정도 걷다 보면, 누가 한 바가지들이 붓기라도 한 듯 땀범벅이 되기 마련이다. 거기다 태양은 어찌나 따가운지.


땀샘이 초과근무를 하든 말든 폭염은 자비가 없다. 땀에 푹 절은 옷들은 조금만 그늘 밖으로 벗어나면 건조한 날씨와 겹쳐 순식간에 버석버석 소금기로 뒤덮인다. 그렇게 옷 위에 다닥다닥 돋아나는 소금들은 마치 따개비나 암염 같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염소들이 반색하며 모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가끔은 숙소에 도착한 뒤에 한 번쯤 긁어 모아 무게를 달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 몸의 성분 함량 표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지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물 몇 그램, 지방 몇 그램, 염분 몇 그램...
그러다 보니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샤워와 환복을 마치면, 당연히 그다음 수순은 빨래가 될 수밖에 없다. 


알베르게들의 세탁환경은 천차만별이다. 깔끔한 세탁기로 무료 세탁과 건조가 가능한 숙소부터, 초록색 물이끼 투성이의 시멘트 세탁 대가 있는 곳까지. 무료 세탁과 건조가 가능한 곳은 정말 드물고, 3유로 내외의 가격으로 세탁기 혹은 건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사립 알베르게는 대부분 세탁기 상태가 좋고, 공립의 경우 웬만큼 연식이 있어 보이는 세탁기들이 많다. 물론 사람들 대부분이 기능성 의류를 입고 오는 편이라, 세탁에 있어 세탁기 성능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손빨래를 하는 편이었고.


식료품 가격이 싼 스페인에서 3유로는 식사 한 끼, 혹은 시원한 맥주 한 잔 가격과 동일하다. 그러니 웬만큼 지갑 사정이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손빨래 대신 식사나 맥주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나는 맥주를 좋아하기 때문에, 세탁기를 한 번 돌리면 맥주 한 잔을 놓친다는 사실이 마음에 사무치는 거다.

빨래야, 네가 아무리 밀려봐라. 내가 세탁기 돌리나 술 사 먹지.
참으로 바람직한 술꾼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칭찬의 의미로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줘야겠다.


어쨌든, 호스텔 같은 공동 숙소는 필연적으로 공공시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기 마련이다. 숙소에 인원이 정말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투숙객을 가장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세탁장 주변이다.
돌이켜 보면 순례자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봐 온 곳이라 생각한다. 그에 비해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잘 추슬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는 저녁식사 때의 식당은 좀 더 문명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상상해보라. 갓 샤워를 마쳐 미처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에, 땀냄새가 진동하는 빨래 꾸러미를 든 채 앞사람의 등 뒤에서 좌우로 기웃기웃하는 여러 성별과 인종의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다양한 직업과 나이,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걷는 순례길이지만, 세탁장 앞에만 서면 그들은 그냥 한 사람의 세탁객이 되고 만다.
화제도 대단치 않다. 비누를 주고받거나 세탁기가 언제쯤 끝이난 다던가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기도 전에 서로의 세탁물을 열심히 빨고 나서 헤어지는 게 고작이다. 그것에는 서로의 인종이나 직업적 배경, 나라 등의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화젯거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어쩌면 몰개성 하기까지 한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묘한 동질감이 피어나곤 한다.

각자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적 테두리를 벗어나, 멀거나 가까운 이곳으로 떠나오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은 무명의 순례자뿐이다. 

물론 각자의 지갑 사정이나 나이, 순례 횟수에 따라 좀 더 부유한, 혹은 좀 더 나이 든, 아니면 더 숙련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길 위에 서있고, 길고 지루한 과정을 지나 성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야 하는 의무를 진 순례자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오로지 그 의도만으로 순례자가 되는 것일까 하고.

순례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건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길을 걷고, 매일매일 기도와 묵상 속에서 성지에 도착하고자 하는 목적만이 순례자로 만드는 걸까.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순례를 시작해 그 길을 걷고, 나름의 답을 얻거나 혹은 빈손으로, 아니면 또 다른 의문을 품은 채 이 길을 떠나곤 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동기인 길의 시작과 끝, 그 과정들이 이렇게 천차만별인데, 과연 까미노 위에 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순례자라는 동일한 이름표를 달게 되는지. 그저 성지를 향해 길을 떠났기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들을 어떤 하나의 큰 담론 안에 굳이 뭉뚱그려 흩어버리고 싶지 않다. 개인의 이유와 맥락은 오롯이 그 자신의 것이고, 우열을 가릴 필요 없이 스스로의 삶 안에서 의미를 가진 채 나름의 가치를 다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차라리 그런 소소함의 힘으로 순례자를 자처하겠다. 우리가 다음날의 걸음을 옮기기 위해 착실하게 준비해야만 하는 일련의 과정들로. 그 단순하고 소박한 준비들이 40일 남짓한 모든 시간을 아울러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된다고 까지 느끼게 만드는 작고 사소한 면면들로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 품은, 길 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굳게 짊어진 어떤 거창하고 영적인 순간들은 오롯이 개인만을 위해 준비된 시간들이다. 시간과 대화를 투자해 공유할 순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타인 사이의 아득한 간극을 넘어 보내는 전보일 뿐이다.


하지만 내일의 일정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작업들을 초점 바깥의 사람들과 무심하게 완수하는 건, 굳이 정의하고 소통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길 위의 모두가 숨 쉬듯 해나가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많은 찰나들도, 반복해서 겪어 내다 보면 불현듯 그때, 그 시간의 인상이 의미가 되어 다가오는 경우가 있듯이.

그런 하찮은 일상을 반복하며 겪어야 하는 작은 순간순간들이, 어느새 길 위의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같은 색으로 나타나기에 우리는 같은 순례자라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특별한 나만의 경험을 위해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때 추구하는 특별함에는, 말없이 일상적인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며 쌓아나가는 과정이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순례길이 그 많은 여행길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빛을 가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특별함에서 모두의 평범함으로, 삶의 무심함이 까미노 위에서는 오히려 더욱 큰 위로가 되니까. 묵묵히 하루의 일정을 위해 수행하는 작은 작업들은 마치 수행과 의식과도 같고, 그 단순함이 너와 나, 우리의 보편성으로 쌓이는 과정임을 알아가기에.


이곳에선 외로워도 외롭지 않고, 혼자라도 혼자가 아니게 된다. 특별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천년 간 이어졌던 그 길 위의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순례자로 족하다. 그 평범함, 그 무의미함이 오히려 위로가 될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 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까미노를 지나갈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 길 위에서 똑같이 하루의 소소한 작업들을 반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그 무의미하고 평범한 순간들을 똑같이 겪었던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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