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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Jan 27. 2019

하루의 일과 #2

순례길24시

스페인의 흉가나 버려진 집들, 혹은 도시에서도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보이는 지역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래피티 낙서들이다. 이런 소규모의 반달리즘들은도시 외곽의 풍경들을 쉽게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가끔은 어떻게 이런데 까지 와서 그래피티를 남기나 싶을 정도로 도시에서 동떨어진 장소에도, 아크릴 스프레이의 요정들이 출몰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애초에 인간이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왔으니, 놀라울 것도 없긴 하다. 그리고 그런 흔적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길 위의 수많은 무덤들이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많은 마을들과 그 주변에 있는 공동묘지를 만날 수 있지만, 돌담과 철창 안에서 조용히 무리지어 있는 묘비들과 길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순례자의 무덤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치 자신의 삶을 바쳐 이 유구한 역사의 길 위에 한 점을 찍었기에.

그들이 숨을 거둘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번쯤 상상해 보게 된다. 완주하지 못한 아타까움과 후회가 먼저였을까. 아니면 그래도 염원하던 길 위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니 만족스러웠을까.

이 길고도 긴 여정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처럼, 그들 모두가 제각각의 의미와 감정을 가지고 세상을 떠났겠지.


묘비에 조약돌을 하나 더하고 마저 길을 재촉하면 금새 사람이 없는 들길, 산길, 밭길로 들어서게 된다. 길이 꼬불꼬불하고 변화가 심한 길들은 그나마 괜찮다. 힘들지만 풍경이 금방금방 바뀌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별로 없고, 쉴만한 장소도 많이 있다.

하지만 부르고스를 지나 레온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메세타 구간은 정말 무자비하다. 끝없이 황량하게 펼쳐진 들판을 직진만 할 뿐이다. 이 구간에서는 정말 쉬지않고 떠들 수 있는 동행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그냥 스스로를 걷는 기계라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특히 17km를 내내 걸어야 마을 하나가 나오는 Carrion de los Condes 부터 Calzadilla de la Cueza 까지의 구간은 굉장히 황량하다. 특히 혼자 걷다보면 주의를 환기시킬만한 요소가 없으니 저절로 머릿속이 표백될 수 밖에 없다.


명상의 요령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냥 걷다보면 지루함에 생각조차 귀찮아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잡념이 사라지고 감각만 남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속 4km정도의 속도로 걷는다 했을 때 4시간 정도면 주파하는 구간이지만, 실제 체감시간은 어마어마하게 길다(...).


길든 짧든 한 코스를 모두 주파하면,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가장 반가운 것은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길다란 직사각형 형태에 왼쪽에 남청색 데코가 되어있는 이 표지판은, 간략한 마을 지도와 마을 내에서 찾을 수 있는 편의시설 등이 명시되어 있다.

알베르게와 식수대를 기본으로 시작해, 편의점이나 바, 병원, 마트, ATM과 은행 등의 정보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전자기기를 아예 떼어놓고 순례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열심히 봐 둘만한 자료다.


순례길에서 내가 마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찾는 건물은 딱 두가지였다. 알베르게와 바. 사설 알베르게의 경우 바를 겸하는 곳도 꽤 있어서 바에서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고 이동하는 번거로움을 줄여주는 장소도 꽤 있었다.

그런 바에서 내가 항상 마셨던 것은 맥주. 한국에서도 친구들 사이에 맥주 좋아하기로 소문난 나였지만, 스페인에 와서는 더욱 맥주광이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가 맥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바에서 모두 생맥주를 파는데다, 가격도 한국에 비해 싼 편이라 오히려 안 마시면 손해인 기분이 들기 때문에.

특히 지방마다 바에서 취급하는 맥주들이 조금씩 달라, 그것들을 맛보는 재미들도 제법 쏠쏠했다.


처음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할 때는 나바라 지방, 잠깐 더 걸어서 라 리오하, 그리고 가장 넓은 자치지방인 카스티야 이 레온, 마지막으로 갈리시아까지.

산 미구엘부터 시작해 마혼, 앰버라거, 세르베자 엑스트라 1906, 에스트레야 갈리시아, 이네딧 담, 암스텔 등등 시간이 지나고 지방이 바뀔수록 바뀌는 맥주들의 평균 가격 1.25유로~2.5유로 사이로 대도시로 갈 수록 비싸졌지만 대부분은 한 잔에 1.5유로 언저리. 한화로 치면 1,600원에서 3,500원 사이로,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어서 실컷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인심이 좋은 바라면 감자볶음(?), 감자 오믈렛, 하몽이나 샐러드를 얹은 빵, 올리브 같은 타파스가 곁들여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맥주만 덜렁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특히 즐겨 마셨던 맥주는 암스텔 라들러와 담(Damm) 레몬으로, 레몬맛을 첨가한 생맥주였다.

한국에 있을 땐 다른 맛이 첨가된 맥주는 맥주로 취급을 안 했는데, 생맥주로 마시니까 이게 또 기가막힌다. 칼로리를 공급해주는 단맛과 생맥주의 쌉싸름함, 홉 향과 레몬향이 섞인 상큼한 향에 뒷맛을 정리해주는 적당한 새콤한함까지. 그리고 짜릿한 통각까지 더해주는 탄산의 느낌이 더해지면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거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맛이 그리워지지만, 다들 알다시피 여행지에서 먹고 마시는 음식은 시간과 장소가 더해져 특별해 지기 때문에, 굳이 한국에서 찾지는 않기로 했다.

괜히 그때, 그곳, 그맛이라는 광고 카피가 생겼을까.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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