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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Nov 03. 2018

장롱 속 상자

언젠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법


내 장롱 안에는 박스가 하나 있다. 나는 이것을 유품상자라고 부른다. 딱히 이름을 붙여놓고 시작하진 않았지만, 용도로 보아 그것이 적당할 것 같아 속으로만 그렇게 부르는 중이다. 아마 군대를 전역하면서 모으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게 나름 의미있었던 것들을 모아둔 상자다.

4년 가까이 사용해 이젠 배터리도 단종된 스마트폰, 군대에 있을 동안 1년을 꽉 채워 썼던 다이어리, 이리저리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기념품들, 몇 장 되지 않는 비행기표 등이 들어있다. 아마 내가 쓴 글들과 사진들도 나중에 프린트되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런 모음들을 굳이 유품박스라는 이름으로 부를 이유는 없다.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둔 상자는 누구에게나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

다만 그것들과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 박스는 물건을 새로 넣을 때를 제외하고는 열리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박스는 물건을 품은 채 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불현듯 죽은 후, 나와 친분이 있는 누군가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은 '아, 이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쳐 살았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만 가진 채, 별 임팩트 없이 잊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막연히 가지고 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이런저런 순간을 지나쳐 살아왔음을 증명하고, 보여지든 말든 그냥 그런 것들을 남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일지도.

나는 이것이 내 나름대로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불치병을 가졌거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마음이 더 크다.

내는 내 삶을 사랑하고,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새로운 국면을 발견하고자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언제가 틀림없이 닥쳐올,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맞이해야만 하는 일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고, 모든 의미를 없었던 일로 되돌려버리는 그런 무정하고 잔혹한 일에 대해.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평생의 작업물이 모인 전시를 가면 어떤 종류의 경외감을 느낀다. 그 작업물이 내 취향이든 아니든, 이렇게나 많은 의미들이 그 삶에 있었구나 하고.

죽음조차도 지울 수 없었던 그 생의 흔적에.

그의 삶 속에서 발견되고 창조된 의미들이, 이렇게 시간을 건너 내게 도달했다는 점에 말이다.


그렇기에 내 장롱속의 상자는 계속해서 커질 예정이다. 그저 잡동사니의 모음일 뿐이더라도, 결국 그것들의 총합은 내 삶속에서 모아둔 의미들일테니.


마치 작은 조약돌을 쌓아 돌탑을 만들듯. 완성을 기약할 수 없고, 모양도 예상하지 못한 채, 나는 계속해서 작은 의미들을 그렇게 쌓아나갈 것이다.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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