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 로마가 없는 아시아의 이야기
서양에는 '계승'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그리스 -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철학, 미술, 건축, 정치 시스템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의 유럽과 미국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처럼 보인다.
이 연결성은 곧 서양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흐름 속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동아시아에는 수천 년 동안 공유된 문화가 있었다.
불교, 도교, 유교라는 사상적 줄기와 한자, 오행, 음양 같은 공통 언어가 있었고,
그것은 한국, 일본, 중국의 일상과 정신에 동시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공통성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부정하고, 배타적으로 구분하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것"을 밀어낸다.
서양은 왜 함께 자라났고,
동양은 왜 함께 자라지 못했을까?
지금은 국경선이 너무도 또렷하지만,
예전의 동아시아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사상은 강을 건너고, 문자는 바다를 건너고,
신앙은 사람보다 먼저 국경을 넘었다.
한국의 산사. 일본의 신사, 중국의 도관을 둘러보면
이름은 다르지만 기묘할 정도로 비슷한 풍경들이 존재한다.
종교적 기능과 건축적 구성, 자연과의 관계 맺기 방식까지
그 안에는 공유된 감각, 연결된 사유가 분명히 살아 있다.
우리는 불교를 인도에서 왔다고 배우지만,
정작 우리가 보고, 느끼는 불교는 중국을 경유해 한자 문화권 전체에 재해석된 사상이다.
도교의 우주관, 유교의 사회 질서, 불교의 해탈 개념은
단지 철학이 아니라 생활 속 질서이자 감정의 기초였다.
어쩌면 동아시아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경외하는 태도"가 공통적으로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문화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한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해석하고, 왜곡하면서
자기만의 전통을 만들어가던 시기.
그렇게 문화는 '혼자 자라지 않고, 함께 자랄 수 있는 생명체'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도
사실 아주 오래된 게 아닐 수 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서구의 근대 문명에 의해 강제로 '현재'를 부여받았다.
그전까지는 함께 흘러가던 문화들이,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것"이라는 말을 절박하게 외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공통의 유산조차 '타자화'되곤 했다.
일본은 근대화와 군국주의를 거치며 천황 중심의 국가신도를 만들었고,
불교와 도교는 정치적으로 길들이거나 축소되었다.
중국은 중화사상과 공산혁명을 겪으며 자국 내의 전통마저 '선택적으로 계승'했다.
특히 문화 대혁명은 '옛것'이라는 이유로 공통 유산의 수많은 맥락을 무참히 잘라냈다.
이렇게 동아시아는 비슷한 문화를 가졌음에도 각자의 사정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문화를 '자국화'하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서로 공유할 수 있었던 기억과 감정은
이제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되었고,
같은 문화를 두고 싸우는 이상한 싸움만 남게 되었다.
누가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는지,
한자는 누구의 것인지, 동양철학은 누구의 유산인지
그런 논쟁은 문화의 생명력을 오히려 고사시키는 일이었다.
동아시아는 문화의 주인을 정하려다가
결국 함께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한 나라'에 끌리지 않는다.
대신, 그 나라가 가진 정서와 감각, 삶의 결에 이끌린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랐고,
중국 무협지를 읽고,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이 전 세계로 뻗어가는 시대의 우리
놀랍게도 이 콘텐츠들은 각국의 고유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닮아 있다.
느림의 미학, 절제된 감정, 여백 속의 상상,
눈앞의 세계보다 눈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감성.
이건 단지 한 나라만의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문화 유전자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과거처럼 '경계를 긋는 방식'이 아니라
공통된 무의식과 정서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서로를 다시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소프트 파워는 군사력도, 돈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렇기에 소프트 파워는 공유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문화는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될 때 강해진다.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동아시아는 분명 함께 흐르던 시간을 가졌고,
그 흐름은 근대의 단절 속에서 잠시 멈췄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를 따지는 시대에서
'함께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문화는 더 이상 과거를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를 함께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되었다.
그 언어로, 다시 연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