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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Nov 02. 2023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책이 올해의 베스트 책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책이다. 오랫동안 그 명성을 들어왔고 여러 사람에게서 추천을 받았으나 당최 무슨 책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과학 서적일 것 같은데 누군가는 이 책을 소설이라고 소개했고, 누군가는 탐사 서적, 또 다른 누군가는 에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 구조도 단순했다. 한 인물(누군가는 주인공, 누군가는 저자, 누군가는 기자라고 했기에)이 물고기를 분류하던 과학자의 삶을 파헤치는 내용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책의 결론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물고기라는 분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까지 알고 나자 책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다.      


 장르가 어찌 되었건, 그 줄거리가 어찌 되었건,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끌리지 않았던 것은 매력적이지 않은 제목과 취향과는 거리가 먼 표지의 일러스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조금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책을 직접 잡았을 때 표지의 촉감이 꽤나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책장에 꽂혀있는 종이책을 손에 쥐려 할 때마다 닭살이 돋는다. 이 장벽을 뛰어넘어 완독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자책 덕분이다. 평소에는 방치해 두었던 아이패드 덕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그렇게 올해의 베스트 책 중 한 권을 만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확히 과학 에세이라고 분류해야 할 것이다. 포털 검색창에 책 제목을 입력할 때 연관 검색어로 ‘장르’가 뜨는 걸 보면 이 책의 정체가 헷갈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갖는 큰 매력 중 하나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을 옮긴 에세이임에도 소설 같은 구성과 과학 탐사 서적 같은 지적 탐구가 담겨있다. 이런 장르를 한데 뒤섞는 것이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책은 소설인 척, 에세이인 척, 과학 서적인 척 쭉쭉 뻗어나간다.      


 저자 룰루 밀러는 인생의 역경의 시기에 우연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를 알게 되었고, 물고기 분류학의 선구 주자였던 그의 삶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빠져든다. 아마도 그 작업이 힘든 시기를 벗어나는 도피처로서 작용했던 모양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은 어느 탐사 보도 못지않게 흥미롭고 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저자의 삶과, 그녀보다 앞서 살았던 과거 과학자의 삶은 소설의 구성처럼 중첩된다. 두 삶의 굴곡은 격정적으로 오르내린다. 룰루 밀러의 쉽고 정확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을 따라. 한마디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가 과거의 한 과학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를 가감 없이 적은 책이다. 때로는 소설 같고, 한편으로는 탐사 보도 같으며, 과학 서적 같기도 한 이 에세이는 끝까지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반전과 뭉클한 감동을 만나게 된다. 단, 주의할 것은 과학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몰입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적을 수 있는 추천사는 여기까지다. 이 뒤는 과감하게 스포일러가 담겨있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안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까 싶긴 하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탐구해 가던 저자 룰루 밀러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생생하게 담아낸 그녀의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은 마당에 끝까지 읽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인간은 결코 평면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쉽게 선과 악의 구분을 짓지만, 인간에게는 악한 면과 선한 면이 공존한다. 저자가 그랬고, 당신도 그럴 테고,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그랬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들을 찾아내 분류하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던 선구자적 인물이다. 그런 일에 세상은 크게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1851년생의 미국 과학자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그 작업에 빠져들었다. 성과를 알 수 없는 일에 끝까지 매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도 가치를 몰라주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는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룰루 밀러가 보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초기 삶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냉철하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과학적으로만 바라보았다. 그의 행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칭찬이나 공들인 묘사를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룰루 밀러의 문장은 감동적으로 읽혔다. 몇몇 대목에서는 뭉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감성적인가? 책의 내용은 지극히 지적이고 차분했는데도 말이다. 선구자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과거 과학자의 행보는 저자에게 일종의 위안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을 통해 혼란스러운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빠져들었던 과학자의 삶은 놀라운 반전을 맞이한다. 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공표되는 동시대를 살고 있었고, 과학을 오역하는 경우 생길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인 우생학에 빠져들고 만다. 우생학은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뛰어나다는 신념으로 세상의 수많은 독재자들과 인종차별자들, 그리고 나치와 히틀러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사상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우생학에 빠져들었던 행보와 함께 저자는 자신의 조국 미국이 한때 얼마나 우생학에 우호적이었던 국가인지를 알게 된다.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이 구원의 손길처럼 바라보았던 과학자의 역겨운 행보와, 한때 유럽을 휩쓸었던 우생학 열풍에서 빗겨 나 있다고 생각했던 조국의 민낯에. 그녀는 이 과정을 실시간 기록물처럼 담아냈다. 우리는 그녀의 문장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그녀의 심정과 혼란,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논리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려는 과학자적 태도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저자 룰루 밀러에게 가장 놀라운 것이 바로 이 지점인데, 이 좌절의 순간에 그녀는 혼란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파고들었던 것처럼 이 혼란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지식을 통해 혼란을 하나씩 정리해 간다. 그 과정에서 한 권의 책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공헌했던 분류학의 최신 지식을 다루고 있으며, 한국인이 연관되어 있다.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저자는 새로운 눈을 뜬 것처럼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되고,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우생학 신봉자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해서 그녀의 혼란이 끝나는가? 그녀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의 나머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이 가장 감동적인 것은 바로 이 마지막 대목이다.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업적에 빠져들고, 그의 삶에 구역질하고, 그의 업적이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자신이 얻은 지식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진화론을 오역한 우생학은 그녀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도 보였을 것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그녀의 존재는 생물학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부당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룰루 밀러는 한 과학자의 삶을 탐구하며 쟁취해 온 지식의 열매로 자신의 혼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건 결코 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주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지식들이 새롭게 재조합되어 혼란에 빠져있던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과정은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다.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따라온 독자라면 이 깨달음과 변화의 장면에서 엄청난 파장을 느낄 것이다. 이는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연관이 있으며, 더 나아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감동은 룰루 밀러의 필력 위에서 춤춘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책에 담겨있는 모든 지식과 깨달음을 다른 작가가 적었다면 지금의 이 책처럼 감동적이지 못했을 거란 것을. 그녀 자신의 삶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번갈아 조망한 소설적 구성, 어렵게 얻어낸 지식과 깨달음을 쉽게 전달한 문장,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녀의 변화를 군더더기 없이 풀어낸 솔직함이 이 책을 완성했다. 룰루 밀러의 문장으로, 룰루 밀러의 인생과 함께 짚어나갔을 때 이 책의 가치는 빛난다. 고작 물고기를 분류하던 이야기가 끝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과정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한다. 그 흔들림에 내 삶도 함께 요동친다. 책이 던지는 파장에 내 인생의 무언가도 변화하는 기분이 든다. 



 과정과 결론은 달랐으나 그녀의 삶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닮아있었다. 집요하고, 열정적이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달랐다. 그녀는 논리적이고 차분하며 냉철한 과학자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선망했던 과학자보다도 더욱 과학자다웠다. 그러했기에 혼란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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