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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의 향기

#책16. 『인생』

위화 2023 푸른숲

by 방수미

『인생』의 본제목은 『活着』이다. 활착의 사전적 의미는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이다. 푸구이의 성은 쉬(徐)인데 ‘천천히’라는 의미를 가진다. 위화는 『인생』 초판 서문에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라 하였다. 그처럼 푸구이는 천천히 뿌리내린다.


푸구이의 가족은 1장의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5장에 이르기까지 어머니, 아들, 딸, 부인, 사위, 손자의 죽음이 이어진다. 세상의 격변기를 다 겪고 인생에 달관한 푸구이는 같은 처지인 푸구이라는 이름의 소와 함께 살아간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젊은 시절에는 도박과 계집질로 재산을 탕진한 푸구이이다. 아버지의 ‘도박빚도 빚이다. 갚지 않을 도리가 없다’라는 말처럼 도박빚에 집안이 파산된 것에 분노하지 않으며 묵묵히 살아간다. 처음에는 갈등이 없고 에피소드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푸구이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위화는 발치사 일을 하면서 민중의 고통을 알았다고 한다. 5년간 그가 뽑은 이가 1만개라니... 위화는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고통을 분노하는 것보다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푸구이는 속임수로 푸구이의 전 재산을 빼앗은 룽얼에게 분노를 표하기보다 오히려 마님이라 부르며 다섯 묘의 땅이라도 받아 식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한다. 푸구이는 나중에 룽얼이 자기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푸구이는 그때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도박이나 몰수나 재산을 한꺼번에 빼앗기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푸구이는 가부장적이다. 유칭을 학교 보내기 위해 펑샤를 다른 집에 보내고, 철없는 유칭의 행동에 거친 말과 주먹이 먼저 나간다. 푸구이가 딱한 것은 알겠다. 열두살의 유칭이 어린 평샤가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뭐든 잘하면 좋으련만, 유칭은 양을 돌보는 것 외에는 열정이 없다. 하지만 뱃속에 있었을 때 자전을 때렸기에 유칭이 나를 무서워한다고 하면서도 푸구이는 유칭에게 다정하지 않다. 끝내 부자는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한 채 유칭이 죽어버리고, 푸구이는 유칭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쿠건에게 듬뿍 준다. 자전은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다.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푸구이가 학교에서 유칭을 때렸다고 하니 유칭이 얼마나 부끄러웠겠냐며 나무란다. 푸구이가 성안의 펑샤에게 갈 때면 단정하게 입고 가라고 하고, 스스로도 매일 머리를 매만진다. 그런 그녀가 펑샤의 죽음을 예견했을 때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질 생각을 못한다. 그렇게 아들 딸을 앞세우고 자전도 떠난다. 펑샤는 가장 자주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녀는 집안이 폭삭 망했어도 큰집에 가겠다고 울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낫을 들고 풀을 베며 일한다. 이쁜 얼굴과 외유내강적인 성격을 보면 엄마와 아빠의 좋은 점을 모두 받았다. 그녀가 얼시와 결혼하여 이웃집 앞까지 청소해주고, 털옷을 짜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시와 손을 잡고 마을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중세와 근대의 중간쯤에 남녀가 평등한 시대의 상징 같았다. 유칭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마도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푸구이는 일하느라 힘들고 펑샤가 유칭을 돌봐주니 유칭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유칭은 매를 자처하거나 양을 키우는 것으로 아버지에게 소극적으로 반항하지만, 결국은 가장 빨리 죽었다.


이런 성격들을 지닌 푸구이 일가의 일대기는 중국의 해방과 변혁과 반동의 시대와 엮인다. 지주가 득세하던 일본 점령기를 거쳐 국·공 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대약진 운동으로 선진국이 되고자 했던 열망, 그리고 실패로 인한 반동적 문화대혁명을 지나 화자인 ‘나’가 등장하는 시대인 1986년까지. 40년의 중국 역사와 관통한다. ‘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을 한다. 민요는 한 민족(국가)의 보편적 정서로써 민요 수집은 사람간의 보편성을 찾는 과정이다. ‘나’와 ‘푸구이’의 만남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위화는 간접적으로 시대를 비판한다. 부상자가 다 얼어 죽는 전쟁의 참상, 마을 대장의 어리숙한 강철 만들기, 의료사고를 내고도 책임지지 않는 의사, 십대 홍위병의 기세등등한 자세. 위화의 인터뷰처럼 『인생』은 “문화혁명의 잔인함과 폭력을 다루고 있다.”


위화는 아버지가 의사여서 부유한 유년생활을 보냈고, 문화대혁명시기에 아버지가 자아비판쇼를 하는 것을 보았고, 학교내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선생님을 비판하는 것이 칭찬받는 것을 알았다. 질서가 무너지고 뒤집혀진 사회에서 위화는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몸소 체득했을 것이다. 역사에 한줄 기록되지 않는 변방의 민중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인생』이다. 작가가 서문에 밝혔던 것처럼, 작가의 사명은 “고발 폭로가 아니라 일체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다.


처음에는 푸구이 일가의 일들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읽으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농민의 삶을 돌아보고 노인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도 위화가 치유하는 위로임이 이제야 보인다. 위화는 하루하루 힘겨운 가난한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임을 보여준다. 제목인 『活着』처럼 말이다.


『인생』서문에 보면 90년대에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공리가 자전으로 나오는데, 영화는 영국아카데미와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바쁜 장이머우 감독대신에 위화가 시사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인터뷰가 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좋은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영화 『인생』은 안봤지만, 하나의 장면만 봐도 위화가 참 실망했겠구나 싶은 부분이...자전이 부자 친정에 갔다가 아들 유칭을 낳고 폭싹 망한 푸구이네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자전은 회색빛이 감도는 붉은 치파오를 입고, 손에는 푸른 바탕에 흰 꽃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네. 그녀가 돌아오는 길 양쪽으로 유채꽃이 활짝 피어 황금물결을 이루었고, 그 곁을 꿀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지."

정말 상상만으로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라 영화의 부분을 찾아봤는데, 참 많이 실망스러웠다. 위화의 감정이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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