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를 할까

feat. 대학원

by Day One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물리가 싫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표정을 짓는다. 눈썹이 미간 한복판에서 만나고, 입꼬리는 묘하게 비틀어진다. 마치 "치킨집 사장이 치킨을 안 먹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이게 내 이야기다. 그리고 아마 많은 물리학과 학생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거였다. 솔직한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잘 읽히고 재밌는 썰을 풀까. 남들처럼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나 '연구의 보람'에 대한 뻔한 찬양을 늘어놓을까, 아니면 진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털어놓을까.

고민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솔직함을 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건 결국 나 자신이고,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내 이야기뿐이니까.


암기 지옥에서 살아남기

나는 대학원생이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평범하다는 건 이런 뜻이다. 천재도 아니고, 특별히 뛰어난 직감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려서부터 물리학자를 꿈꿨던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의 나는 물리가 하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학부에서 가르치는 물리'가 싫었다. 그럼에도 결국 물리학과 대학원에 왔고,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비로소 물리를 사랑하게 됐다.

학부 시절 물리학 수업의 풍경을 그려보자.

오후 2시, 200여 명이 빼곡히 들어찬 대형 강의실. 교수님이 들어오시면서 첫마디를 던진다. "오늘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유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1시간 15분간의 대서사시. 칠판 한 면이 가득 찰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식의 향연.

나는? 그냥 받아쓰기만 했다. 영혼 없는 타자기가 된 것처럼, 칠판의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는 일에만 매달렸다. 중간에 "왜 이렇게 되는지 이해가 안 돼요"라고 손을 들어 질문하는 용감한 학생이 가끔 있었다.

교수님은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해밀토니안이 이렇게 작용하는 이유는..." 하시면서 칠판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10분 넘게 상세하게 설명해주셨다. 분명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이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세하게 알려주신 거였다.


문제는 나였다.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왜 갑자기 해밀토니안이 튀어나오는지, 그게 물리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이 모든 과정이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다시 손을 들고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넘어가는 일이 반복됐다. 교수님은 분명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셨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시험은 더 가혹했다.

문제 유형은 정해져 있었다. 강의에서 다룬 공식들을 조합해서 숫자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식이었다. 결국 '누가 더 성실하게 외웠나'를 겨루는 암기 올림픽이었다. 가끔 창의적인 문제가 나오면? 그건 그냥 포기하고 부분점수라도 받으려 애썼다.

문제는 나는 외우는 걸 지독히도 못한다는 거였다.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싫어했다. 정확히는 '이해 없는 암기'를 극도로 혐오했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거였다. 수학은 암기과목이 아니었다. 공식을 외우는 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면 응용이 가능했다. 그래서 논술 전형으로 대학에 왔을 정도로, 나는 논리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고를 선호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도 똑같았다.

F=ma라는 공식이 있다. 그러면 그냥 F=ma인 거다. 왜 힘이 질량과 가속도의 곱인지, 이 공식이 어떤 철학적 배경에서 나왔는지, 뉴턴이 이걸 발견하기까지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E=mc²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외우라는 거였다.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 제곱이다. 끝."

나는 계속 궁금했다. 이 공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쓰이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후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는지.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사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은 극소수였다. 그것도 물리가 정말 좋아서 수업 외 시간에 혼자 인터넷을 뒤지고, 원서를 찾아 읽고, 밤새도록 파고드는 '덕후'들 뿐이었다. 나머지 90%는 나처럼 그냥 버텨내고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물리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냥 공식의 바다에서 4년간 헤엄쳤을 뿐이었다.


대학원은 어떨까

수업 방식은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시간'이었다.

학부 때는 어땠는가? 한 학기에 20학점 넘게 들으면서 정신없이 바빴다. 이번 주에 물리학 시험이 있으면 다음 주에는 수학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다음 주에는 실험 레포트 마감이었다. 하나를 깊이 파고들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표면을 핥고 지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달랐다.

이제는 이해를 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내준 과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짜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를 위해 얼마든지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하나의 개념을 붙잡고 며칠을 고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이걸 언제까지 이해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해할 때까지요." 마감이 없는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밤, 나는 양자역학 교재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파동함수가 뭔지, 관측이 왜 확률적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다가 문득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봤다. "아, 이게 그거구나!"

학부 시절 외웠던 슈뢰딩거 방정식이 갑자기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냥 외우기만 했던 공식이 실제로는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울 뻔했다. 대학원에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놓쳤을, 진짜 이해의 희열이었다.


물리학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이제야 깨달았다. 물리는 사실 수식의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수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성적 해석(Qualitative interpretation)'이다. 즉, 그 수식이 자연의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지, 왜 그런 형태를 가지게 됐는지, 물리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공식은 모르면 찾아보면 그만이다. 구글에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검색하면 나온다. 하지만 그 공식이 담고 있는 물리적 직관과 의미는 다르다. 그 안에 숨어있는 자연의 이야기,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려는 끝없는 노력의 결과물인 그 철학은 이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해에는 반드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마치 원자가 에너지를 흡수해서 들뜬상태가 됐다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야만 광자를 방출하는 것과 같다. 뇌 속에서도 충분한 양의 고민과 시간이 쌓여야만 이해는 계단식으로, 한순간에 점프한다. 서서히, 조금씩 이해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아!" 하면서 모든 게 명확해진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고 나니 재미있는 능력이 생겼다.

이제는 누가 정말 이해하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있어 보이려고 개소리를 하는 건지가 눈에 보인다. 진짜 아는 사람은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개념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는 척하는 사람은 어려운 말을 더 어렵게 설명한다. 본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학회에 가면 이런 경우를 자주 본다. 발표자가 복잡한 수식을 잔뜩 보여주면서 열심히 설명하는데, 정작 "이게 물리적으로 무슨 의미냐"라고 물으면 얼버무린다. 그럴 때마다 '아, 이 사람은 수식은 알지만 물리는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라는 고민의 답은 여기에 있었다.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나 '과학의 발전'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SNS에 돌아다니는 것처럼 "물리학자가 알려주는 ○○의 비밀" 같은 식으로 써야 할까.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그냥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하자.

재밌는 썰보다는, 있어 보이는 이야기보다는, 그냥 솔직하게 내가 보고 겪고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 주관과 내 시선으로, 내가 마주한 현실들을 말해보고 싶다.

물리학도로서의 이야기들.

학부 시절의 암기 지옥부터 시작해서, 대학원에서 만난 진짜 물리학까지. 실험실에서의 밤샘 작업, 데이터와 씨름하는 일상, 논문을 읽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순간들.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절망적이지만, 결국은 내 것인 이 모든 순간들.

대학원생으로서의 이야기들.

지도교수님과의 미묘한 관계, 선후배 사이의 눈치 게임, 가설이 틀렸을 때의 허탈감.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는, 작은 발견의 기쁨들.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들.

물리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들. 일상에서 만나는 현상들을 물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재미. 그리고 가끔은 "내가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실존적 고민들까지.

이것이 내가 찾은, 나만의 첫 이야기다.

완벽하지도 않고, 특별히 드라마틱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진짜다. 그리고 아마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나 공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 공간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어떤 반응이 올진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련다. 물리학처럼,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해보는 거다.

결과는 나중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