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산업 변화를 이해하려면 기술 그 자체보다 먼저 인프라를 봐야 한다. 전략은 코드 위에서 작동하지만, 코드는 반도체 위에서 돌아가고, 반도체는 데이터센터에 쌓이며, 데이터센터는 결국 전력 위에 서 있다.
인공지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물리적인 기술이다. 서버는 전기를 먹고, 전력은 저장과 조율을 요구하며, 그 중심에 배터리가 있다.
AI 연산량이 증가하면서 전력 수요는 과거와 전혀 다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더 이상 단순한 전산실이 아니라 하나의 발전소에 준하는 전력 소비 주체가 되었고, 전력의 순간적 불안정성은 곧바로 경제적 손실과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배터리는 친환경 기술이 아니라 전력망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장치가 된다. 전력저장장치(ESS)는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를 보완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자력과 가스 발전 같은 기존 전력 시스템에서도 주파수 조정과 피크 대응, 비상 백업을 위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전기차(EV)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다. EV의 성장은 단기적 유행이 아니라 도시 구조, 에너지 효율, 소음 규제, 그리고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구조라는 기술적 변화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내연기관차에 비해 고장 요소가 적고 유지비가 낮으며, 전자·AI 시스템과의 결합이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EV는 점진적으로 비중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로봇 산업이 본격화되면서 배터리는 이동 수단을 넘어 산업 전반의 에너지 단위로 확장되고 있다. 공장 로봇, 물류 로봇, 서비스 로봇 모두가 고안전·고밀도·고신뢰의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며, 이는 배터리 기술 발전을 다시 자극하는 구조를 만든다.
이처럼 배터리는 더 이상 ‘환경 산업’의 일부가 아니다. 배터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전력 인프라이며, 산업 운영의 기본 자산이다. 그래서 배터리 산업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싸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어떤 규칙으로, 어떻게 쓰이느냐”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중국은 대규모 생산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LFP 중심의 물량 전략을 택했고, 이는 빠른 시장 확산에는 유리하지만 안전과 규격, 신뢰가 중요한 영역에서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반면 한국은 고니켈 계열 배터리, 고안전 ESS, 프리미엄 EV 배터리, 그리고 까다로운 글로벌 고객을 상대하며 축적한 운영 경험을 기반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한국 배터리 산업의 중심에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가 있다. 두 회사의 전략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단순한 셀 제조를 넘어 시스템과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대규모 생산과 글로벌 공급망을 바탕으로 EV, ESS, 전력망을 관통하는 운영형 배터리 플랫폼을 구축하려 하고 있고, 삼성SDI는 고신뢰·고안전 영역, 즉 AI 데이터센터와 산업용 ESS, 그리고 향후 전고체 배터리로 이어지는 프리미엄 규격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단기 실적만 보면 변동성이 크지만, 이들은 모두 셀 가격 경쟁이 아닌 규칙과 표준의 경쟁으로 이동 중이다.
배터리 산업의 원천 기술이 단일 국가나 단일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생각도 현실과는 다르다. 기초 과학은 학계와 연구소에서 출발했고, 초기 상용화는 일본이 주도했으며, 대규모 제조와 공급망은 중국이 장악했고, 안전과 품질, 운영 기술은 한국이 강점을 쌓아왔다.
지금의 경쟁은 새로운 화학 조성 하나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소재, 공정, 제어, 인증, 재활용까지 포함한 전체 생태계 경쟁이다. 양극재와 음극재, 전해질과 분리막 같은 소재 기술은 여전히 중요한 차별화 요소이며, 이 영역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배터리 산업의 수익 모델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배터리를 팔아 매출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면, 앞으로는 배터리를 설치하고 운영하며 관리하고 교체하고 재활용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플랫폼 비즈니스가 된다. ESS나 데이터센터, 전력망에 한 번 들어간 배터리는 수년, 수십 년 동안 같은 규격과 같은 운영 체계를 요구하며, 이는 강력한 락인 효과를 만든다. 배터리는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니라 장기 운영 자산이 되고 있다.
이 흐름에서 한국 배터리 산업의 기회는 분명하다. 중국처럼 물량으로 승부할 수는 없지만 “아무나 쓰지 못하는 배터리”, “사고가 나면 안 되는 배터리”, “국가 인프라에 들어가는 배터리” 영역에서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제조국의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배터리가 쓰이는 방식과 기준을 함께 설계하는 위치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는 기업만의 과제가 아니라 산업과 국가 전략이 함께 맞물려야 가능한 영역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배터리는 조연이 아니다. 반도체가 연산의 심장이라면, 배터리는 그 심장이 멈추지 않게 하는 혈관이다. 전력이 흔들리면 AI는 멈추고, 전력이 안정되면 산업은 확장된다. 배터리는 그 안정성을 보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기술이며, 앞으로 20년간 인류 산업의 속도를 결정하는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배터리 산업은 이미 ‘미래 산업’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AI, 데이터센터, 전력망, 전기차, 로봇이라는 이름으로 작동 중인 현재 산업의 중심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국 배터리 산업은 여전히 중요한 선택지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