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현대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장경제, 분업, 경쟁, 가격이라는 개념들은 대부분 이 책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스미스는 흔히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동시에 그는 현대 경제학의 뿌리를 놓은 사상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자본주의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여 사회주의 토대를 만든 마르크스 역시 이 책을 깊이 연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자본론』을 쓰면서 『국부론』을 반복해서 읽고, 그 구조를 따라가며 비판을 전개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상과 그것을 비판하는 사상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우리는 흔히 그를 “이기심이 질서를 만든다”라고 말한 경제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이해일뿐이다. 그는 시장을 설명한 사람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관찰한 사상가였다. 그리고 그 관찰의 핵심에는 하나의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공감하는 존재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스스로를 평가한다. 스미스는 이 이중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과 하나의 위험을 동시에 읽어냈다.
이기심과 공감이 균형을 이룰 때, 시장은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기심이 공감을 압도하는 순간, 사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미스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감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공감이 약해지면 인간은 이해를 멈추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은 점점 단순해진다. 부, 성공, 외형적 성취.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을 쉽게 평가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출발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 현상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자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가난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거나 지혜가 부족한 사람으로 쉽게 규정된다. 물론 현실 속에는 다양한 삶의 경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개별 사례가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하나의 기준으로 굳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된다.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판단이고, 판단은 곧 평가로 이어진다. 평가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 연봉, 자산, 생산성, 성과. 사람은 하나의 삶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비교 가능한 대상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에서 인간은 기능으로 정의된다.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이 지점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스미스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 변화였다.
그는 또 하나의 위험을 보았다. 분업은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을 점점 더 작은 기능 단위로 쪼개버린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노동에 묶인 인간은 사고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잃고, 점차 기계와 유사한 존재로 변해간다. 그는 분업을 찬양했지만, 동시에 그 끝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 주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의 P4 라인을 견학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간 위를 웨이퍼 운반 로봇들이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 넓은 공간 안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밀하게 설계된 시스템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고, 인간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이를 바라보는 존재로 서 있었다.
공장은 이미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향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술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분업과 자동화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었다. 인간은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점점 더 시스템의 주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이제 공장에 머물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보조하는 기능들은 점점 더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과거 분업이 인간을 단순화시켰다면, 지금의 기술은 인간 자체를 제거 가능한 변수로 만들고 있다.
스미스가 보았던 위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다.
그는 시장 참여자들의 도덕적 한계도 명확히 보았다.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공공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그의 지적은, 시장이 결코 스스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은 인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위에서만 작동하는 구조다. 인간의 도덕이 약해지면 시장도 함께 왜곡된다.
그래서 스미스가 두려워한 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시장 속에서 인간이 점점 사라지는 일이었다.
이 두려움은 과거의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기업은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정확하게 움직이려 한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그 목표를 거의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도구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효율이 극단으로 가는 순간, 인간은 점점 필요 없는 존재로 밀려난다.
인간은 비용이 되고, 변수이자 제거해야 할 불확실성이 된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단지 더 빠르고, 더 정교해졌을 뿐이다.
스미스가 보았던 분업의 끝은 오늘날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분해되고 있으며, 이번에는 훨씬 더 정밀하게 나뉘고 있다. 그리고 공감이 개입될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지금 더 절박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점점 더 평가하고 있는가.
아담 스미스가 두려워했던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공감과 도덕을 잃은 이기심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인간을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효율을 중심에 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