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지리산 천왕봉 일출 후기
어제 새벽 세시부터 하루 종일 지리산 종주하느라 피곤한 몸을 억지로 끌고 오늘 새벽 3시에 천왕봉을 항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서서히 몸이 내 의지에 순응하며 출발 전 천근만근이던 근육 저항이 점차 사라진다.
지리산의 땅과 숲은 아직 어둠이 가득하지만 검은 하늘은 굵은 별빛으로 가득하다. 수많은 별이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서 검은 밤하늘에 설렘을 보낸다. 달도 가느다란 초승달로 희미해서 하늘을 온전하게 별들에게 양보한다.
갑자기 내면에서 행복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존재의 환희가 크게 느껴지고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라는 자각을 한다. 그동안 제대로 자극을 갖지 못했던 세포와 장기가 이른 새벽 엄청난 압박을 받고 온몸의 이곳저곳에서 발아하는 듯하다.
모처럼 느껴 보는 깨어 있고 살아 있다는 절절한 느낌이다.
어제 세석산장 도달하기 전 힘든 산행으로 입에서 단내음이 가득했다. 내 몸이 견디려고 저장해 놓은 포도당을 장기에 마구 내뿜었고 내 혀가 그것을 맛보는 것이다.
육체의 곳곳에서 에너지를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먹는 것이 부실하니 몸은 스스로 방어 시스템을 작동한 것이다.
바람이 나무에 세차게 부딪치며 파도 소리가 일어난다.
어둠이 별빛에 무너지고 죽어가며 나무와 바위에 형태를 남기며 새벽의 침묵을 무너트린다.
내면에서 강력하게 솟아나는 행복감은 내 몸을 휘감은 후 지리산 검은 숲을 향하고 저 멀리 별들의 세계로 향한다.
지리산은 크고 길고 깊다. 북한산 능선길이 10km 정도인데 30km니 3배나 길다. 높이도 1915m이니 2배 이상 높다. 지리산 대장봉인 천왕봉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만약 남쪽 노고단에서 출발했다면 지속적으로 1,0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를 거쳐야 한다.
장터목 산장에서 촛대봉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길은 마치 천왕이 자기의 높은 위상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가파른 바위길로 연달아 경계를 쳤다.
나는 그 길을 뚜렷한 철학 없이 그냥 오른다. 지리산에 왔으면 무조건 천왕봉에 오르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다. 그 건 내 삶의 방식이다. 산에 오르면 무조건 정상까지 간다.
직장에서는 나 아닌 외부 요인이 작동하여 정상을 오르기 어렵지만 산 정상을 오르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존재의 강렬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네 발로 기고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지더라도 누구에게 대신해 달라고 할 수 없는, 순전한 내 일이다.
지난주 설악산 등산도 마찬가지였다. 출발 전 맨발로 대청봉 정상에 오른다고 각오했다. 그런데 막상 새벽 3시에 맨발로 땅을 밟으니 등산로의 돌과 흙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간밤에 내린 비로 곳곳이 질척거렸고 등산로 돌들은 미끄러웠다.
기온이 내려가 대청봉을 한 시간 남겨놓고 발이 얼기 시작했다. 당장 신발을 신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수 있다고 내 발이 지속적으로 경고를 보낸다.
그러나 나는 발의 신호보다는 사고의 결단을 선택한다.
잠자코 있으라고 발에 명령을 내린다. 둘이 지속적으로 싸우느라 육체와 정신이 힘든 상황에 부딪쳤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자꾸 이렇게 싸우면 대청봉을 오르는 아름다운 순간이 사라지고 내면의 갈등으로 고통스러운 추억이 될 수 있다고.
발이 뭐라고 하든 나는 기쁨을 느껴야 한다.
강렬한 의식은 육체의 고통을 잊게 하거나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한 시간 내내 의식적으로 기쁨을 느끼려고 나를 몰아세웠다.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모두가 두툼한 옷으로 싸맸으나 나는 드디어 반팔과 맨발로 대청봉 정상을 올랐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체험을 했다.
천왕은 세찬 바람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을 냉정하게 맞이한다. 부지런한 등산객 십여 명이 이미 새벽 여명을 향하여 서 있거나 정상의 바위들 사이에 앉아 있다.
천왕이 남한 육지에서는 가장 높으니 지상의 모든 것을 굽어본다. 내가 천왕보다 높이 섰다. 그 높이에서 나도 애타게 동쪽 여명을 본다. 마치 세상은 동쪽 하늘만 있어야 한 듯 모두가 그곳만 쳐다본다. 그 동쪽의 여명과 일출이 새로운 시작이고 고통의 끝이다.
모든 고통과 고난을 끝내고 희망과 소원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어젯밤 별빛을 보던 누군가가 내일 일출은 완벽할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최고의 일출 조건이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지리산 제1경인 천왕봉 일출의 대 장엄이 시작되었다.
벌써 천왕은 백 명 이상 산 꾼의 소원을 품고 있다. 모두가 두 손으로 스마트폰 및 카메라를 붙잡고 셔터를 쉼 없이 누른다. 일출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번 일출은 지금까지 본 모든 일출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장엄하다.
삼십여분 남짓 지상 최대의 쇼를 펼친다.
감탄사가 사방에서 나온다.
천왕과 별빛이 자리를 마련한 뒤, 동쪽 하늘 끝을 가득 채운 붉게 물든 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분홍색 얇은 비단 뒤에서 모든 지구 생명의 원천인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 세상은 완벽하게 변한다. 햇빛은 굽이 치는 저 산들과 회색 빛 강물과 들판에 그리고 이곳 천왕에도 어둠의 찌꺼기를 한순간에 몰아내고 눈부신 빛을 쏟아낸다.
환희의 대 서막이다.
이 땅에 기쁨과 사랑이 가득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