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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C Mar 03. 2024

회전목마

Be kind Rewind, the movie

이른 아침, 마른 입에 밥 넘어가듯 12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꾸역꾸역, 날짜를 손꼽으니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는 듯 하다.

그리고 2016년의 한 해도 12월의 하루하루에 끌려 사라져간다.  

우리 관계를 새롭게 해보고자 했던 게 올초의 계획이었다.

1년의 시간을 되짚으며 내 마음을 정리해보고 싶다. 

흔히 하는 얘기로, 

“운명이 있다고 믿느냐?”에 대해

나는 확고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기 이전에 이미 하늘이 정한 명운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생의 순간순간에 어떠한 선택을 하든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니까. 오히려 모든 순간의 선택은 운명에 정해진 길을 따라 가게 될 테니까.  


창세기 2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적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로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그분도 어떤 기준을 따르셨으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라고 하였다. 그런데 앞서 “자기 형상”은 무엇일까. 국문으로는 불명확하지만 영문을 참조해보면 “사람 그 자신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두로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이란 그 자신의 형상, 소위 팔자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운명이 있기에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다! 


장자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놀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불운한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조난당한 사람들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 운명의 덫에 걸린 네 운명의 의지는 뭐였을까를 묻는다면, 그건 완전히 당신의 몫이 될 것이리라. 다만,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세계, 비록 내 인생이지만 내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한 불가사의한 세계를 헤매고 있는 불행한 사람일 뿐이다.  

꿈속에서 누군가에 쫓길 때면, 항상 발걸음은 천근만근이 되어 땅에서 떨어질줄 몰라서 붙잡히곤 하는데 어릴 때는 악몽이 따로 없었다. 30대에 들어서도 그런 꿈을 꾸곤 하지만, 이젠 꿈속에서도 눈치채곤 ‘또야’그러면서 깨곤한다. 재밌는 건, 가장 최신 버전은 더이상 도망가려고 뛰는 대신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이다! 왜 떨어지지도 않는 발걸음을 옮기려고만 했을까. 왜 날아서 갈 생각은 못했던 것일까.  


당신에게 해서는 안 되는 온갖 더럽고 사악한 말들을 내뱉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리플레이하면서 그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말이 되게끔 곱씹어 보기를 수없이 반복해 보았다. 사랑한다는 이유, 가족이라는 이유가 그 순수한 절대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 ‘선과 악’을 일일이 말로 논한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에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친구(폴포츠 역을 맡았던 그 남자)를 찾아가는데, 그녀를 알아본 남자가 아무말 없이 노래를 멈추고 와락 안아주던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내가 넘어서지 못했던 거대한 장벽을 부숴버리는 강력한 힘이 발산되는 듯 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신으로 남길 원했으면 왜 굳이 불완전하고 헛점투성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내려왔을까. 슈퍼맨, 그 중에서 맨오브스틸(Man of Steel)에서 초자연적 힘을 가졌지만 인간적 한계를 끝까지 고수하는 슈퍼맨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사찰마다 불상을 모셔놓고 있다. 교회에 십자가상이 걸려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도의 왕자로 태어나 불교에 귀의한 부처님에 관한 역사적 기록도 있다. 중요한 건 불교를 믿는 중생, 그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이 모두 부처라는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불성을 자각하는 것에서 깨달음을 얻는 진리를 설파한다.  


난 하느님이 예수로 이 땅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시범일 것이란 상상을 한다. 인간적 형상을 하고, 인간적 한계를 온전히 수용하면서도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말이다. 앞서 “자기 형상대로, 신의 형상대로”라는 구절이 내게 의미를 주는 이유인 셈이다.  


운명을 믿기에 난 완전히 자유롭다는 생각. 그 완전한 자유를 더이상 아끼지 않기로 했다. 

불행한 나의 운명이 불행한 현실이 만들고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면, 그건 내 운명이자 내 선택인 것이다. 이미 바꿀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다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만은 오직 내게 달린 것이고 거기 내 자유의 영역이 있다.  


과거에 천동설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평선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저끝에 다다르면 폭포수가 떨어지듯 지구의 절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동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콜룸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것이 바로 역사이다.  


우리 감정은 너무나 쉽게 천동설과 지동설을 끊임없이 갈아타는 것 같다. 너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거나 혹은 깊은 우울과 침통에 빠지는 것 같이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의 바다가 잔잔해지면 비로소 파도의 물결을 느끼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린 한 때 세상의 끝이고 종말이라고 여겨졌던 감정의 절벽을 보는 듯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다. 내가 본 어떤 환영에 좇아 악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눈. 거긴 절벽이 아니란 것을 실증했다면 어땠을까. 막연히 ‘저긴 절벽이 있을꺼야. 이젠 끝났어.’라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두려움과 불안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의식은 마치 차에 달린 ‘내비게이션’ 같다. 목적지만 정해 놓으면 어떤 곳으로 가더라도 새로운 경로를 탐색해서 어떻게든 목적지로 갈 방안을 내놓지 않는가.  지난 일년을 결산해 볼 때, 내비게이션의 목적지와 같은 것으로 ‘미학적 태도’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평하고 싶다. 그것도 대단한 성공으로 말이다.  


일본 국보 26호는 <이도다완>이라고 알려진 ‘조선의 막사발’이다. 어감에서 느낄 수 있듯 이것은 왕가의 계보를 가진 조선의 문화재급 도자기가 아니다. 저잣거리나 서민들의 일상에서 굴러다닐 법한 그런 잡기적 그릇인데 일본에서는 국보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해 들어왔을 당시, 도자기 기술이 훨씬 뒤처져 있던 일본은 다도의 전통이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발전되어 있어 조선이 다완에 관심이 무척 컸었던 것이 배경이 되어 이도다완이 오늘날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천한 잡기적 그릇에서 일본의 국보로서 보존되기까지 그 드라마틱한 지위의 격변은 놀라운 것이다. 조선의 백자, 고려청자, 상감청자와 같은 우리나라의 보물급 도자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하디 천한 막사발일 뿐인데 말이다.  


예술사(혹은 미술사)에서 새로운 가치의 발견은 흔한 일이지만, 내가 알기로 이보다 더 천지개벽의 전환을 비교할 대상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그들만의 다완전통 속에서 이 잡기를 예사롭지 않게 보는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 같은 미학적 안목과 그것을 자신의 문화와 전통으로 체화시킨 그것이 바로 국보를 탄생시켰다.  


너무나 천하고 사사로운 것에서 점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한 것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 이것은 서로 다른 것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사물(인간과 동식물을 포함)안에서 이뤄진다. 도자기가 가마속 온도에 따라 토기, 도기, 자기로 나뉘는 것처럼.  


마태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는 구절은 내게 신선함을 준다.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이니 뭐니가 아니라 바로 “성령에 이끌리어”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 구절을 들은 바 있었는데 최근 직접 찾아보면서 확인하였다.  


천사와 악마를 대비시킬 수는 있겠지만, 예수나 하나님을 악마와 견줄 수는 없는데 그건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데 하나님의 권능속에 악마나 사탄은 그저 잡것에 불과할테니까.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극복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예수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는 것이다. 성령의 의도는 예수의 태도를 시험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예수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믿음에 충실한 것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난 성경을 내비게이션처럼 켜놓고 나만의 목적지를 설정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태도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결정적 내용이라는 것 말이다.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일 수 있지만 생명이란 것이 그렇게 불완전하고 취약한 것일까? “물컵의 반이 찼다” 아니면 “물컵의 반이 비었다”는 순전히 태도에 달린 것이리라.   


2016.12.31.


#stupidityismy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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