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영 Jul 31. 2024

신앙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는 종교의 이점

무교인이 바라본 종교의 가치

저는 1년의 종교 교육이 의무인 기독교계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매주 교내 전용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채플 시간이 있었고, 학기 중 한 번은 일요일 아침 교회 정기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관련 교양 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는데, 실제 교회의 목사님께서 교수님으로 강의를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무교이고,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어디에서 얻는지에 대해 항상 의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길거리에서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전도 방식은 극히 일부이며, 일반 교회에서는 이러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상적인 전도 활동에도 묘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이해' 강의를 들으며 교수님께 질문했던 일화가 떠오릅니다. 신의 존재를 오감으로 느끼거나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인지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명확한 대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덧붙여, "제가 신을 느낄 수 있다면 닿는 데까지 전도에 힘쓰고, 한 명이라도 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답변으로는 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았고, 신앙은 과학적 증명이나 감각적 인지로 인식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대화 이후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은 

변함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알렉산더 대왕을 알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저는 “전쟁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 말고는 모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집필한 책보다 예수를 다룬 책이 훨씬 많고, 날짜도 예수의 등장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왜 알렉산더 대왕은 실제 존재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알렉산더 대왕을 ‘인간’으로 나타낸 이야기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예수님은 ‘신’이라 표현합니다. 인간이 죽었을 때 천국으로 구원하는 존재라고 말이지요. 제게 ‘신’은 유니콘과 같이 상상 속의 존재로 여겨집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예수가 등장하기 전과 후를 기원전, 기원후로 나누는데, 이는 당시 하느님과 예수에 관한 사상이나 책이 인류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날짜를 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한 대상을 다룬 사람이나 글이 많다는 것이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쉬는 시간이 훌쩍 지나서인지, 교수님과 저는 ‘신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결론에 이르며 대화를 마무리하고 수업을 재개하셨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저를 전도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한동안 저는 이 이야기를 꺼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득 ‘신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종교를 가지는 것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무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주제였는지, 이에 대한 결론과 뒷받침할 다양한 상황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글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꼭 한 번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이제 실현하게 되어 굉장히 기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족이 식사 전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족들은 모두 손을 맞잡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손이 서로의 온기를 전하며 이 순간만큼은 모든 일상적인 걱정과 분주함이 잠시 멈추고, 온 가족이 하나가 됩니다. 화자는 음식에 대한 감사와 가족의 평안과 축복을 기원하는 말을 합니다. ‘아멘’이라는 구절과 함께 눈을 뜬 가족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따뜻한 분위기가 식탁을 감쌉니다. 이 상황을 묘사하면서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제 가슴이 몽글몽글해집니다. 가족 간의 유대감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은 세상의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매일 반복되며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 가족 식사는 사실 당연하지 않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누군가의 노력이 반영된 곡식과 가축이 우리에게 닿는 과정에 감사하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 저에게는 가족과 하나 되어 평범한 식사를 하고, 서로에게 공감하며 대화하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라는 역사적, 문학적, 철학적 내용에 대해 공감대를 갖고 모입니다. 제게 성경은 우주 속 은하들과 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학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성경은 신과 인류, 사람들의 관계와 여러 상황에 대해 복잡한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는 도덕적 가르침이나 삶의 목적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합니다. 인생의 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철학과 비슷해 보입니다. 각자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책을 읽고 모임에서 토의하는 북토크와 유사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공부하며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 정신적,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성경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지적 탐구를 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초등학생 때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 일요일 아침에 집 문을 두드리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이끌리듯 예배를 드리러 가서 어른들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가 하품을 하기도 합니다. 찬송가를 함께 듣고 부르며 신나기도 했습니다. 헌금 봉투에 자랑스럽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넣으며 왜인지 모르게 뿌듯해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A형 간염에 걸려 간 수치가 높아져 입원했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어른들이 방문해주셨고, 병원 침대에서 진지하게 기도해주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제게는 감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았는데도 저를 걱정하시고, 제 어머니께 공감해주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밖에도 성가대의 합창은 웅장하며 멋있습니다. 동네 작은 교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사실 함께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에 가로막혔던 것 같습니다. 또한 봉사와 같은 대외적인 활동을 진행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규칙적인 예배 참석과 성경 공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시간을 마련해 줍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 정보 과다와 스트레스 속에서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누군가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인 것처럼 즐거워하고, 슬픈 일은 나누는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교회는 처음 방문해도 웃으며 반겨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요일에 뚜렷한 목적 없이 늦잠을 자는 것보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몸과 정신에 더 이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성당이나 절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신’의 존재 여부를 배제하더라도 종교의 이점에 대해 논하다 보니, 왜 기본권 중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지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에게 종교란 인간 내면의 성장과 사회의 건강한 작용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도 느껴집니다.


저는 종교의 기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사실 성경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구분하지도 못합니다. 이 글에 나타낸 제 경험과 생각들은 기독교나 종교를 부정하거나 비방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제 주관으로 종교의 앞면과 뒷면이 아닌, 옆면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의 평범한 하나의 의견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에게 ‘종교’라는 말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끝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영감이 떠오르고, 이를 글쓰기로 나타내는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 글이 글쓰기 취미에 소중한 양분이 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과 깨달음, 그리고 치유를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