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린 왕자》에서 핵심 문장을 꼽자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가 아닐까 합니다. 여우가 한 말로 작품 전체가 지향하는 철학적 관점을 압축하는 문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본질이며 어린 왕자가 겪는 여정은 끊임없이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질은 표면 아래에 존재하며 단순한 외관이나 사회적 기준으로는 포착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본질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직면하게 됩니다.
《어린 왕자》에서 말하는 본질은 ‘나다움’입니다. ‘나다움’은 구성 요소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구성 요소는 선천적으로 가지는 실체라기보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실존적 구조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본질은 ‘고정된 나’가 아닌 ‘어떤 나다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전통적 철학에서는 본질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간주하였고, 이는 변하지 않는 근원적 성질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실존주의 철학에서 본질보다 존재가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철학자들은 본질을 ‘주어진 값’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하는 값’으로 이해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나다움’을 강조합니다. 개성, 창의성, 차별성 등은 모두 나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외부적 징표에 불과합니다. 이충녕 작가는 현대 사회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람’을 나다운 사람으로 평가(1)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창의성 자체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일 뿐입니다.
위 기준은 본질을 시각화하고 나다움을 성과나 개성 획득 문제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나다움’을 찾아 나설수록 되레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나아가 나다움을 만들고자 주변 시선에 더 예민해지고,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이란 외부가 규정하는 개성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본질은 결정의 주체가 되는 ‘나’의 내면적 구조입니다. 즉 남과 다르다거나 창의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방식으로 살아갈 용기, 의심하더라도 실행할 수 있는 실천력, 스스로 세운 가치 기준을 지켜나가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나다움이며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왕자》에서 앙가주망(engagement)은 ‘대중이 선보이는 양식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 태도, 규범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내부에서 찾는 사람에게 앙가주망은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환됩니다. 대중이 아닌 ‘내가 정한 양식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앙가주망은 사회적 복제 개념이 아닙니다. 본질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사회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처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태도가 됩니다.
둘째로 앙가주망은 본질을 구성하는 실천적 행위입니다. 본질은 생각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실천을 통해 혹은 행동을 통해 구체화 됩니다. 스스로 믿는 것을 실행할 수 있을 때 그 행위는 본질을 입증합니다.
어린 왕자에게 앙가주망은 귀환을 선택한 순간에 드러났습니다. 그는 지구에 있는 다양한 인물처럼 허영, 권력, 타인의 인정 때문이 아닌, 스스로 믿는 사랑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본질이 실천을 통해 구성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철학자들은 본질을 ‘불변하는 실체’로 간주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의 본질이 예입니다. 하지만 위 정의는 인간의 복잡한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경험이 바뀌면 가치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며, 행동이 바뀌면 결국 본질도 바뀝니다. 따라서 본질이란 고정된 영원한 성질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가 선택과 실천을 통해 구성해 나가는 과정적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나’는 특정 본질을 타고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본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선택은 불변이 아닙니다. 오늘 선택한 방식과 내일 선택할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은 자유를 회복하는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 힘’, ‘믿은 것을 실행할 힘’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외부 기준에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따라서 본질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택을 책임지고, 실천할 때 매 순간 만들어집니다. 여우가 말한 너머를 보라는 이야기는 외부 요소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내면적 시선을 의미합니다.
1. 앙가주망(Engagement)
앙가주망(2)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에서 사용된 개념으로, 단순히 ‘참여’나 ‘개입’을 넘어 스스로 책임지고 선택하며 실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존은 본질 앞에 존재하며 인간은 선택과 행동을 통해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앙가주망은 외부 요구, 집단 시선, 사회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만든 가치, 신념, 원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즉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결심이나 의도가 아니며 주체적인 선택(3) , 행동(4) , 책임(5) 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앙가주망이 철학에서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장 폴 사르트르 덕분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적 성질을 가진 채 탄생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어떤 사람이 될지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선택이 곧 본질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앙가주망은 필수적입니다. 선택과 실천을 통해 존재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택을 피할 수 없으며 미루는 것조차 선택입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지, 어떤 가치를 따르는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무엇을 행동으로 보여주는지 등이 개인적인 ‘본질’을 구성합니다.
앙가주망은 흔히 ‘사회적 참여’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훨씬 깊습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특정한 행동 양식을 요구합니다. 남들처럼 성공하고, 일하고, 행복하라 등 무수한 압박 속에서 자아는 종종 목소리를 잃고 외부 기대에 맞춰 살아갑니다.
이에 맞서 싸우는 존재가 바로 앙가주망입니다. 앙가주망은 “나는 내가 선택한 양식대로 살겠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실존적 자각이며 삶을 직접 설계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앙가주망은 자유와 책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자유롭도록 강요받았다.(6)”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실존적 무게를 강조합니다. 자유는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선택한 모든 행동이 곧 본질이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앙가주망은 “내 선택이 나를 설명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앙가주망은 확신에 기반한 행동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선택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행동할 때 비로소 앙가주망이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핵심은 확신이 없어도 선택하고, 흔들리더라도 실천하며, 결과가 두렵더라도 책임지려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앙가주망은 용기 있는 철학입니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세운 양식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1)《가장 젊은 날의 철학》 2024.11.11
(2) 지식인·예술가의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간섭을 뜻합니다. 이 개념은 사르트르가 문학의 사회 참여를 설명하며 체계화했습니다. 작가는 상황을 폭로해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고, 독자는 그 앞에서 책임을 지며 필연적으로 사회적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앙가주망은 ‘자기 구속’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는 실천적 행위를 옹호합니다.
(3)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규범이 아니라,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기준을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4)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에서 실천 없는 신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5) 선택과 행동에 따른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6) “We are condemned to be 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