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란
시간은 추상적이면서도 극도로 현실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보거나, 만지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은 삶에 가장 기초적인 배경이자 조건이며, 심지어는 존재 형식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 구조를 넘어 기존 방식과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모모》에서 시간은 훔치거나 빼앗기는 개념입니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이며 결코 빼앗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존재는 시간이다.”라고 말하며 시간을 삶의 구조로 이해했습니다.
두 관점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무엇인가?’라는 같은 질문을 향합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며 변하지 않는 시간은 움직이고, 쌓이고, 반복됩니다. 그 안에는 빠름도, 느림도, 성급함도, 여유로움도 없습니다. 오직 결에 따라 흘러갈 뿐이고, 인간은 흐름 위에 얹혀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일한 시간 속에서도 서로 다른 속도로 삽니다. 어린 시절은 유난히 빠르게 지나가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느려집니다. 이는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나이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누적되는 경험, 깊이 있는 감정, 밀도 있는 의미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인지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 년이 십 년처럼 느껴질 수 있으며 반대도 가능합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체험 구조가 다르기에 시간이 가지는 밀도 또한 같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주관적 실재’로 느끼는 방식입니다.
하이데거는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인간이 살아내는 방식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즉 시간은 외부적인 흐름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적 빠름과 느림은 단순한 체감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
의미가 충만해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느껴지고, 삶이 텅 빌수록 끔찍할 만큼 빠르게 지나갑니다. 고통은 끝없이 길어지고, 행복은 찰나에 사라질 듯 스쳐 갑니다. 차이는 물리적 속도가 아니라, 존재가 품은 밀도에서 옵니다.
시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는 종종 외부 대상에서 올 때가 있습니다. 반클리프 아펠에서 출시한 ‘미드나잇 플라네타륨’ 시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시계는 태양계를 담고 있고, 실제 각 행성의 공전 주기를 반영합니다. 지구가 한 바퀴 도는 데 1년이 걸리고, 토성이 한 바퀴 도는 데 29년이 걸리며 수성은 단 88일 만에 순환합니다.
이 시계를 매일 손목에 찬다면 우리는 ‘내가 사는 시간’이 아니라 ‘우주가 움직이는 시간’으로 호흡하게 됩니다. ‘미드나잇 플라네타륨’에서 시간은 인간 중심이 아닌, 우주 주기로 구성된 개념이며 우리는 단지 작은 한 조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미드나잇 플라네타륨’은 시간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모든 존재는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지만 서로 공존하며 세계를 이룹니다. 시간은 ‘하나의 속도’가 아닌, ‘다양한 속도들의 집합’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는 시간’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가깝습니다. 존재마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며 그 방식이 곧 본질입니다. 하이데거는 시간이 단순히 ‘흘러가는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인간을 아우르는 기본 조건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와 시간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세 가지 구조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방식입니다. 둘째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향한 열망입니다. 셋째로 현재는 과거에 겪은 기억과 미래에 올 가능성이 동시에 모여드는 장소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틀이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 순간’을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현재는 한 지점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중심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나를 만들고, 미래를 향한 기대가 현재 삶에 영향을 주며 이 순간이 감정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곧 누구인가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시간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해석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모》에서 시간은 인간에게 준 선물처럼 묘사됩니다. 모모는 대화하는 재능으로 시간을 되돌려 줍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을 저축 수단으로 바꾸었고, 사람들은 경험을 빼앗긴 채 시간이 지닌 개념만 쫓으며 살아갑니다.
하이데거 시선으로 볼 때 이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지나가 버리는 시간’을 쫓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회색 신사처럼 시간이 지닌 의미를 잘못 이해한 채 양적으로 계산하며 소유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와 의미, 행동입니다. 모모는 시간을 되찾아주고, 하이데거는 시간이 인간을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두 언어는 비록 다르지만, 마지막에 도착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시간은 존재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1. 시간성(Temporalität)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시간 개념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물리적인 흐름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세계 안에서 측정되는 시간’이라 부르며 본질이 아닌 존재를 파악하는 데 사용되는 이차적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시간은 양적인 흐름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드러내는 시간, 즉 구조 그 자체로서의 시간입니다. 그는 현존재가 시간을 살아낸다고 보았으며 시간은 내부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시간성은 현존재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스스로 이해하며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시간성을 세 가지 구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세 구조는 과거, 현재, 미래와 닮아 있으나 단순한 시간 구분이 아닌 현존재의 실존적 방식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과거 구조를 의미하는 이미-그렇게-되어버림(Geworfenheit, thrownness)입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특정 언어권과 가정환경에 속한 채 자라고 사회적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이미 그렇게 된 상태로 존재를 규정합니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짐이 존재의 근원적 출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둘째로 현재 구조를 의미하는 지금-여기에서의 현존(Verfallen, fallenness)입니다. 이는 우리가 익숙한 일상에 속에서 사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눈앞에 떨어진 일, 반복되는 습관 및 사고방식에 갇혀 살아갑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일상성의 빠짐(fallen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타인 속에서 여론이라는 파도에 쓸려 스스로 가능성을 잃어버린 채 시간을 피상적으로 소비합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성이 피상적으로 굳어지는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셋째로 미래 구조를 의미하는 앞서-달려감(Vorlaufen, projection)입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지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입니다. 이 선택과 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위 세 구조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일된 구조로 작동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반이며, 미래는 오지 않았으나 현재를 움직이는 방향성이 됩니다. 현재는 과거의 자취와 미래의 기대가 모여드는 장소입니다. 하이데거는 세 가지를 통합한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시간성(ursprüngliche Temporalität)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나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 시간성이 본질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가장 나다운 가능성”이라고 부르며 죽음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재정렬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은 남 시선이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정한 시간 구조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우리를 죽음 지향적 존재(being-toward-death)라고 정의했습니다. 죽음을 자각하는 것은 시간성을 깊이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삶 전체를 현재 속에서 재배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주장한 시간성은 단순한 시간 흐름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형성되고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과거에 던져져 있고, 현재에 빠져 있으며, 미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 구조가 교차 되는 점이 바로 ‘이 순간’이며 그 순간은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는 살아 있는 중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