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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Aug 23. 2024

암과 딸과 엄마와

나의 말 04.

  뇌암이라고 했다. 몇 해 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고모, 지난주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은 남편의 직장 동료,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아 축하 파티를 열었던 선배까지, 주변에 암환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놀란 건 암이 아니라 뇌였기 때문이다. 대장, 위, 간 폐처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주요 기관뿐만 아니라, 이름도 생소한 췌장이며 갑상샘에도 암세포가 퍼진다. 몸속에서 존재감 확실한 뇌에 암이 생겼다는 말이 왜 이리도 생경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불과 사 년 만에 우리는 영정사진으로 만났다. 퇴임식 때 걸 현수막 디자인에 넣으려고, 조르고 졸라 겨우 받았던 그의 증명사진이었다. 여전히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 반갑고도 낯설었다. 퇴직 교사의 평균 수명이 67세라며, 농담이랍시고 던진 누군가의 방정맞은 말이 떠오른다. 유머감각과 함께 눈치까지 말아먹은 그는, 67세보다 더 사시려면 건강 챙기셔야 한다며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딱 67세 되던 해에, 교감 선생님은 뇌암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많이 울지는 마세요. 엄마, 이제는 안 아프시잖아요.”


  상주 자리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과 딸이 앉아있었다. 나보다 열 살쯤 어려 보이는 남매가 오히려 이모뻘 되는 조문객을 위로해 주었다.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밝아 보였는데, 드디어 엄마가 편안함에 이른 지금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슬픔의 크기는 상대적이라 비교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이제 막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 내 슬픔과 같은 무게는 아닐 테니. 더러 눈물이 부끄러운 순간이 있다. 더 큰 슬픔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내 작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떨어질 때다. 눈을 크게 꿈쩍여봐도, 천장을 올려다보며 흐르지 못하게 막아보아도,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스스로를 다그쳐 보아도, 가신 분 얼굴을 쏙 빼닮은 그의 딸이 말갛게 웃는 순간 속절없이 투둑, 떨어지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내 눈물은 내 감정 밖에 모른다.     


  교감선생님과 그다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근무한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였다. 투명한 아크릴 창 너머로, 기억도 나지 않는 영양가 없는 대화 몇 마디만 오고 갔다. 마스크로 가려진 눈 아래 얼굴은 내 맘대로 그려서, 막상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마주하면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시간은 가끔 같이 밥을 먹는 때뿐이었다. 학교 급식을 하지 않을 때라 점심은 컵라면이나 먹고 말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인가 교무실에 밥 많으니 같이 먹자며 전화가 왔고, 거절을 어려워했던 나는 썩 내키지 않은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오지 않으니 화장도 하지 않고 대충 편안한 옷을 걸쳐 입고 출근해도 됐지만, 교감선생님은 늘 타이트한 정장에 힐을 신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어깨는 쫙 펴고, 스탠딩 책상에 서서 일했다. 지각만 면해도 다행인 내 눈엔 교감선생님의 봉긋 띄워 세팅한 머리가 왕관을 쓴 것처럼 보였다. 차림새부터 자세며 말투까지 깍쟁이의 표본 같았다.      


 “이 계란찜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곱게 다진 당근과 파가 잔뜩 들어가서 색도 고왔지만, 알 수 없는 보드라운 식감에 입이 재밌었다.


  “두부를 으깨 넣은 거야. 이건 잔멸치를 다져 넣은 거고.”

  으깬 두부였다. 뭔가 남다른 감칠맛은 다진 잔멸치에서 나온 거였고. 계란찜에 두부와 잔멸치라니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다. 계란찜 한 조각을 먹는 동안, 건강한 반찬 만들기를 주제로 교감선생님의 긴 설명을 들었다. 아니, 이 양반 꽤 수다쟁이잖아. 사람들의 맛있다는 칭찬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자신의 요리 비법을 대방출하던 그 점심시간, 나는 교감선생님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본 날이었다.     


  암이 생기면 뇌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팩맨 같은 동그란 암세포가 입을 90도에서 45도로 펼쳤다 접었다 하며, 이리저리 바쁘게 헤집고 다니다가 야금야금 갉아먹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얀 천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시커멓게 번진다. 먹물 방울이 또 한 방울, 한 방울, 툭툭 떨어지며 검게 물들어간다. 그의 뇌도 이렇게 검게 물들어 버린 걸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처가 생긴 자리 위로 딱지가 생기고, 채 아물기 전에 떨어지고, 또 딱지가 생기기를 반복하며 깊어지고 넓어지는 자리에 피고름이 고인다. 그렇게 영영 회복되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상갓집 상차림의 기본값이라고 생각했던 육개장 대신 조갯살 된장국이 나왔다.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국에 말아 씹으면서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채소와 건강식을 좋아하셨는데, 마지막 손님상에도 된장국을 놓아주시나. 별 실없는 생각 너머로 컴퓨터 화면 보호기 같은 복잡한 이미지만 어지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나는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내었다.


  “어머니는 닮고 싶은 선배였어요. 멋진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셨으면 좋겠어요.”


  결국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눈치 없이 치고 나오던 눈물과 달리, 내 용기는 꽁무니를 빼기만 한다. 엄마를 보내는 그 날, 나는 미소지을 수 있을까?  돌아가는 조문객에게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내는 그의 딸을 보니, 교감선생님 마음 편하게 가셨겠구나 싶다.




  작년 여름, 엄마는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가족력이 있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초기에 발견되어 아주 힘든 수술은 아닐 거라고 했다. 입원을 위해 차로 엄마를 모셔온 동생이 입원 수속을 밟아 두었다. 내가 할 일은 다 준비된 병실에 와서 하루를 보내고,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다가 수술 마친 엄마가 괜찮은지 확인하며 하루를 더 보내는 게 다다.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되는 거였다. 언제나 엄마와 살가운 건 오히려 남자인 동생이어서, 2박 3일 보호자로 내가 있어도 괜찮은 걸까 걱정되었다. 엄마가 불편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은, 실은 내가 불편할 것 같다는 걱정의 다른 말이었다.



  대화가 끊기면 볼 책 두어 권, 핸드폰 충전기, 세면도구, 슬리퍼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왔어도 병원에서 며칠 지내려면 필요한 물건이 더 있었다. 종이컵과 환자용 생리대, 간단히 끼니를 때울 즉석밥을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고, 구내식당이며 카페의 위치를 알아두기 위해 엄마와 병원을 헤집고 다녔다. 병원 문 앞에서 배달된 음식이나 과일, 커피까지 받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며 웃었다. 수술 전날 저녁부터는 금식이다. 영 배가 고프지 않아 함께 저녁은 거르기로 했디. 힘든 건 밥 한끼 굶는 게 아니었다. 밥 먹는데 드는 시간도 필요치 않아서 남아도는 시간을 뭐든 하면서 ‘함께’ 보내야 한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지하 식당가로 내려가 메뉴를 살펴보며 가격대비 먹을 만한 게 뭔지 정해두고, 구름다리를 건너 옆 병동으로 넘어가 야외 정원이나 옥상을 산책하고, 다시 내려와 복도에 걸린 <별이 빛나는 밤>과 <피아노 치는 소녀들> 같은 명화 복제품을 감상한 후, 휴게실에 앉아 누군가 틀어놓은 미스터 트롯을 보다가 병실로 돌아왔다. 몇 바퀴를 그렇게 걸으며 엄마와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너 아침마다 커피 한 잔씩 마셔야 하는데 병원 안에 카페가 여러 개 있어서 골라 마실 수 있겠다는 엄마의 말과 커피가 비쌀까 봐 드립백을 챙겨 왔다는 말 따위였다. 애써 수술과 수술이 잘 안 되었을 때와 수술 이후의 이야기 같은 건 입에 담지 않았다.     


  보호자 대기실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새로운 사람 몇 명이 추가되었다. 책을 좀 읽다가 관두었다. 소리를 낮추어 음악을 듣다가, 왼쪽 이어폰은 빼고 오른쪽 이어폰으로만 듣다가, 곧 그마저도 관두었다. 수술실 밖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걷고 또 걸었다.


 “서☐☐씨 보호자분!”     

  몇 번을 외쳐 부르는 소리에도 그게 나인줄 몰랐다. 여기서 나는 누군가의 배우자도, 엄마도, 딸도 아닌 보호자였다. 내가 엄마를 보호하려고 여기에 왔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라는 것도.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과 수술 중 체온이 떨어져 늦어졌다는 말 뒤로 따라오는 설명은 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굳이 확인시켜야 하는 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는 엄마의 몸에서 들어낸 조직을 보호자인 내게 보여주었다. 한때는 내가 살았던 그 작은 방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엄마의 자궁이, 주먹보다 작은 핏덩어리로 내 눈앞에 있었다. 어쩐 일인지 몸 밖으로 나온 엄마의 자궁이 아직도 따뜻하게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취가 깨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엄마는 춥다고 했다. 이불을 하나 더 얻어와 덮어주어도 춥다고만 했다. 차가운 손과 발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가 입이 너무 마른다고 했다. 손수건에 생수를 적셔 입술을 닦아주었다. 엄마가 불평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나? 엄마가 언제 아픈 걸 내색한 적이 있었나? 엄마는 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보호자가 되어서야 엄마도 안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동생과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원 밖을 나섰다. 한여름 대구는 태울 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 춥다 싶을 정도로 유지되는 병원 안에서는 내내 긴 겉옷을 걸치고 있어도 한기가 돌았다. 몸이 조금씩 녹는 기분이었다. 차가워진 손끝과 발끝까지 온기가 돌자, 눈에서도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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