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백점 맞았다!

당신을 기억하는 나 5

by 김보리

스물두 살에 왔응께 60년 살았슈. 그때는 집이 이렇게 좋지 않구 초가집 흙안케 동안케 하구 살았슈. 여기 탄광이 크게 있어서 한참 때는 살기 좋았었슈. 먹고 살 사람들이 탄광에만 다녔응께. 석탄 많이 나왔슈. 우리 집 양반 쉰다섯 살 그때쯤 그만 뒀슈. 이 동네서 다 탄광으로 다녔응께 큰 트럭에 탄 싣고 길도 크고 좋았었슈. 인저 자꾸 무너지고 그러니께 그렇게 되더라구.


여기서 밥 장사 했슈. 열다섯, 열일곱 명까지 했쥬. 조기 방이 하꼬방 마냥 지었던 방이유. 지방 사람들하구 딴데서 온 사람들하구 저 방에서 잤다닝께. 그때는 방값은 안 받구 밥값만 받았지. 우리 집 양반이 자기도 다니닝께 힘들게 일하는데 뭐하러 방값까지 받느냐구. 여기가 가까우니께 딱 한 시간 점심시간 주거든유. 도시락 갖고 가믄 암케도 차잖유. 12시 땡하면 점심 먹고 올라가믄 1시 되지. 와서 먹었지. 여기선 국허구 뜨끈뜨끈허게 먹구. 그때는 어린애들 국민핵교 다니구 헐 때유. 밥값을 싸게 받아서 그런지 돈이 안 모여지대유. 그 눔 받아서 시장 봐다 반찬 해주고 그러믄 뭐 그렇지. 그땐 농사 안 지었는데 난중에 쪼끔 지었쥬.


우리 집 양반이 탄광 그만뒀잖유. 그 양반도 직업이 떨어졌잖어. 그러닝께 장사 시작했쥬. 문고리 장사, 이고 다니는 잡화 장사 했슈. 실이니 뭐니 지금은 설탕이지만 옛날에는 사카랑 먹었잖유. 촌에서 겉보리나 그런 거 샀쥬. 내가 갖고 간 거 있지, 그거 있지, 그렇게 무겁게 해서 데니면서 애들은 공부 갈켜놔서 성공은 시켜놨슈.


그 양반 건강원 차려서 했슈. 장곡서. 허시다 돌아가셨거든. 그래 내가 그걸 한 10년 했지. 장곡서 거기 하나라 잘 됐었슈. 시방 이발소 자리. 그 집 터 빌려 했는디 주인네가 서울서 내려왔지. 건강원 허기 전에는 보따리 장사하다 반찬 했지. 갈치, 조기 그런 것들 떼갖고 다니며 팔구. 동네서는 챙피해서 저 등배실, 횡경리, 청양, 목련, 꼬챙이, 안심리 그런데루 먼 길로 나가구 단골 심어 다녔슈. 버스 탈라믄 겁나게 힘들고 새벽밥 먹어야 하고 아는 사람 하나 새겨놓고 정 급하면 그 집에서 자구.


겨울에는 김 장사 했슈. 서울 가면 1000원 씩 남았어. 한 회사랑 손잡아 가지구서 아는 사람 하나 있어갔구 친척이 거기 살아서 날 믿구서 사드라구.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혀. 집으로 다니구, 회사로 다니구. 회사 가믄 여러 사람이 사닝께 많이는 50톳 씩, 30톳, 기차가 완행이라 겁나게 걸렸지. 열 톳 팔믄 돈 만 원 떨어졌응께. 먹고 살라구 하늘이 봐 줬는지, 수완이 좋았는지 그건 잘 모르겄슈. 살아온 게 참 지지라게도 살았슈.


장사하러 디닝께 아들 유유 사다 놓구서 시어머니 보구 맥이라고 했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그걸 바로바로 끓여서 맥여야 하는디 그렇게 헐 줄 모르셔서 그걸 식지 말라고 이불 속에다 푸~욱 넣어놨다가 맥였어. 그래서 탈 나가지구 아들 하나 잘난 거 잃었슈. 시방은 병원에 다닝께 일찍 고치잖아유? 옛날에는 병원에 안 가구서 뽕나무 구데기 그걸 들기름에 달여서 맥였슈. 그걸 시어머니가 맥이더라구. 그라믄 기침 가라앉는다구. 그렇게 해구서 애들이 백일기침 할 수 있는데, 백일동안 기침해야 낫는다구, 옛날엔 그랬슈.


우리집 양반이 먹구 살아야 하니까 트럭 조수를 다녔슈. 이 밑에 가면 다 쓰러져가는 다리 있는데께 차고 하나 있슈. 거기 정부미 쌓는 곳인디 기사들은 술집으로 점심 먹으러 들어가구 조수가 남았었는디 조수가 그동안 시간 줄인다고 차를 돌려서 잘 넣어둔다고 한 게 잘못 밟아가지구, 사람들이 창고 앞에 쭉 섰었는데 그 차가 창고를 처박아서.


그 날 장 섰었슈. 장 서는디 장에 갔다 오다 잠깐 뭐 물어보니라고 그 양반한테 갔다가 막 올라와서 그 때 임신했었는디 이 밑에 사돈댁 처녀가 쫒아왔더라구. 저기 외삼촌 다쳤으니 빨리 광천 가 보라구. 부들부들해서 갈 수가 있슈? 갠신히 내려갔지. 광천 가는 딴 트럭에 실어다주더라구. 그 때 시방 광천 고려병원 거기가 위생병원이었슈. 거기로 갔는디 그 날 저녁 돌아가신다구 방 비지 말라구 그러더라구 의사가. 근디 본인이 답답하다구 안 드러누울라 그러더라구. 가슴에서 낙숫물 떨어지듯 똑똑똑 소리가 나구 말도 두서없이 하구.


그러는 바람에 애들 남매 백일기침으로 죽는 것두 몰랐슈. 죽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갔다 묻구서 와서 얘기하더라구. 같이 다친 이 그이가 와서 그 이튿날 얘기를 하더라구. 난 애들 묻는 것두 못 봤슈. 자기들끼리 쑥덕쑥덕거리고 말더라구.


말할 것두 읎쥬. 저 길로 안 다니구 요 너머 다니는 길 있슈. 넘 부끄러워서 글루 다녔슈. 저 여편네가 젊디 젊은 것이 얼매나 팔자가 사납길래 사내 그렇게 되구 애들 둘 그렇게 됐나,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 같아서, 내 자격지심에. 그네들은 날 볼 때 딱하게 볼 텐데 나는 자격지심으로 그렇게 넘 부끄럽더라구. 팔자가 세서 그렇게 생긴 것 같아서.


시방 정신이 읎어서 그렇지 정신 차리고 얘기하믄 한두 끝두 읎슈. 울기 숱하게 울고 다녔슈. 넘 보는데서는 울지도 못허구 산길 다니면서. 걸어서 다니다 차 오면 타구. 그 다음에 뱃속에 있는 애도 가드라구. 그 담에 있어갔구 딸 낳슈. 걔가 지금 쉰 살이 넘었어. 시방. 4살 터울로 아들 낳고 다음에 아들 낳구. 그러구서 암것두 읎는 집 자꾸 낳아서 뭐 하느냐구 유산시켰어. 셋이나 유산시켰어. 내가 맥여 살릴 수가 읎잖유.


이고 다닝께 힘들었쥬. 다 아파유. 머리두 빠지구. 나 그래서 키가 줄었슈. 그런 걸 걔가 봐놔서 공부를 잘 했슈. 걔는 핵교 갔다오믄 숙제부터 해놓구 나가 노는 애유. 백점 맞으면 접어서두 안 들고 이렇게 들고 와. “엄마, 나 백점 맞았다.” 나두 그 기쁨으루다 뼈가 빠지도록 일하구. 어느 날 내 일하고 있응께 지가 와서 한댜. 아, 요맨한게 뭘 해유? 맴이 이쁘지. “관 둬. 니가 아니어도 엄마 실컷 혀.” 그러믄 “엄마 힘들잖어.” 그래 내가 “너 쳐다보면 엄마 힘 하나 안 들어.” 그랬슈.


옛날에 공부할 때는 수,우,미로 했는디 걔가 꼭 수, 제일 못해야 우, 어쩌다 하나씩 들고 왔슈. 근디 어느 날 성적이 떨어진겨. 그 때 한 대 종아리 때렸네, 큰 아들. “니 동상은 이렇게 잘했는디 점수가 왜 떨어졌냐구.” 그런디 그 뒤로 점수가 쑥쑥 올라갔구 범계국민핵교 다녔는디 애들 점수 매길라믄 보호자가 필요하잖어. 걔를 꼭 델고 다니더라구. 지 누나가 여상 다니다가 미용 뵌다고 빚 얻어주고 미장원 차려줬지. 지 동상을 글루 옮기라구 해서. 누나 공이 컸지. 지금두 누나에게 겁나게 잘허유. 며느리두 형님하구 상의해야 한다구 그려.


일본시대가 내가 여덟 살 때였거든. 야학에 다녔지. 야학 다니는데 어른들이 못 대니게 하드라구. 거기 다니면 못 쓴다구. 어디로 잽혀간다구. 얼마 안 있다가 6·25나구. 야학 다녀서 국문 깨트려서 내 이름자는 알유. 친정어머니가 겁나 까탈스러워서 버선 볼 대잖어. 올이 조금만 비뚤어져도 다시 하라고 했슈. 그래 꼼꼼하게 배웠지. 두루마기며 저고리며 내가 내 손으로 다 가위질했지. 손바느질로 그렇게 안 가르쳐줬음 못했지.


우리 오빠는 군인 가서 죽고 언니는 옘병 앓다 죽었슈. 외딸이유. 사촌들도 다 죽고 읎슈. 나 여섯 살 먹었나, 나도 앓고. 나는 살라 그랬는지 물 떠주면 받아먹는디 언니는 영 안 먹더랴. 그때는 열이 40도 넘어도 병원 가나? 홍주 월계 거기 올라가믄 거기 딱 하나 있었슈. 나 아홉 살 먹어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놓구 밥 잡숫고 그러셨슈. 막내딸이라구. 생각하면 까마득하지.




진병순 어머니는 1936년생으로 홍성읍에서 태어나 장곡면 산성리로 시집왔습니다. 3남매를 모두 여우고 산성저수지 마지막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식들의 권유에도 아파트는 답답하다며 집을 지키고 살아가십니다. 자식들은 어머니 고향살이 시키는 것 같다면 마음 아파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마을까지 내려오시기 힘드신데 혹여 혼자 계실 때 편찮으시기라도 할까 괜히 마음 졸여집니다. 어머니, 아프지 말고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