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는 나 14
더 이상은 못 고칩니다. 몸땡이를 왜 이렇게 망가뜨려놨느냐구 그러대. 내가 이 발을 걸을라구 별 운동을 다 했슈. 안 돼. 겨다니지 않으면 붙잡고 거의 일어나구 그래.
내가 여기 스물한 살에 시집와서 지금 여든다섯인디 형님 아우들이 참 잘혀. 내 병원 다닐 때두 거기까정 다 오고 동네 와서두 꼼짝 않고 앉았으믄 그냥 박카스니 뭐든 죄 들어와. 내가 인저 서울 돌아다니면서 고생하믄서두 나두 그맨치 했지. 그랬더니 아주 하나 빠짐없이 다 해유.
시집을 온께 구항면 온유서 살다왔는디 세상에, 갠신히 요 목구멍만 살어. 바작바작 갠신히. 우리는 괜찮게 살았거든? 어머니가 억척스러워서 남당리서 생선 떼다가 팔아가지구서 배 골치는 않구 살았어. 시집 온께 우리집 양반이랑 시아즈버니랑 군인 간 겨. 우리 시어머니가 호랭이보다 더 시끄러운 양반인디 그래도 내가 집에서 배운거는 길쌈이고 바느질이구 다 괜찮게 배워갔구 왔기 때문에 여기 와서 내가 밤을 새서라두 다 꼬매고. 길쌈도 사람 얻어서 허더만.
내가 “형님, 나하고 둘이 혀.” 그래 지청구는 안 먹구 살았는디 너무 읎어서 맨날 그눔의 것이 걱정이여. 그래 내가 속으로 군인만 갔다 와봐라.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랬지. 근디 군인 갔다 집에 댕기다가 내가 먼저 애기를 낳어. 그거 낳는데 비누 한 장 사 줘야 살지. 기가 맥혀. 집에 가서 돈 갖다가 비누 사면 식구들이 다 빨구서 쬐끄만 거 남으면 식구들이 어디다 감춰. 그런 집에서두 살았어. 하나 낳고 둘 낳구 셋 낳으면 이 어매가 어디를 움직입니까.
한 7년 됐는데 그럭저럭 하다가 내가 우리 할아배 보고 “저기 정희 시집간데 천북 좀 가봅시다, 김 한다 하는디.” 거기 갈라믄 죙일 걸어가야 허유. 아침 일찍 먹고 갔더니 집은 깨깟하게 해 놓고 사람이 읎슈. 문을 열어본께 김을 그냥 말하자면 100개씩 해서 쟁여놨어. “이눔의 지지배는 이 김을 다 으떻게 쳐 먹을라구 잔뜩 사 놨댜?” 그래 보니 저 모퉁이서 통통통 오더라구. “너 이거 어떻게 먹을라구 이렇게 싸놨냐?” “어이구, 언니. 저 모퉁이 하우스 가 봐.” 널어 말린 거 거두러 들어왔댜. “언니 친척들 서울 살면 김 좀 갖구가 봐.” 그러네 “너 지금 나한테 장사하란 소리여?” 그랬더니 “언니 손해 읎어.” 그래.
많이도 못허구 50톳을 갖고 갔는데 그거 한자리서 들어오잖유. 서울 구로구 고척동인디 며느리, 아들 준다구 10개씩 가져가니 모잘라유. 천 원씩 붙고 괜찮대. 지금 돈으로는 별 거 아니지만 그때 돈으로. 야, 이거 괜찮다, 여기서 하루 종일 밭 매야 쌀 한 되 값 줬어. 그 뒤로 자꾸 움직이는겨. 광천서 열차 타믄 두 시간이면 가니께. 다시 광천 와서 버스가 읎으면 택시 타구. 나 장사할 때는 택시가 있었슈. 비싸지두 않구.
광천 김 상회 가믄 제일 맛있는 거 이고 지고 와. 부칠지두 몰러. 집에서 일만 하다 나와갔구. 부치는 거 그런 거 하나 몰르구 영등포 계단이 얼매나 많았어. 그러커구 댕겼더니 괜찮어. 일이 터진 게 노량진 수산시장 가 보니께 동태 같은 것두 두 짝으로 사유. 거기서 층층대가 높은 걸 올라가고, 머리에 이고 지고 두 짝을 머리에다 이고 한 짝은 들구, 제자리서도 발짝이 안 떨어지는디 그 눔의 돈이 뭐여.
그렇게 갔다 놓으면 식당하는 사람 너댓이 노나 갔는데 그것두 괜찮대. 여기서 무슨 장사가 됩니까? 거기 그때 나 혼저혀. 장사 하나 읎고 독점인디 시골서 농사짓는 거 찾으면은 여그 와서 쓸 만한 눔 집집마다 부탁해갔구 이제 부치는 것을 알았어.
여기서 차 대절해서 마루버시 가서 곡식이란 곡식 다 해서 용달차 불러서 싣고 가서 부치고 또 노량진 가서 영등포는 짐 부치기가 아주 까다로워유. 그래서 멀어도 노량진 가서 부치면 앞이 탁 터져서 용달차만 대믄 쭈르르 오니께. 그러케다 오믄 부쩍 팔리니께.
애들 아버지허구 애들만 놔두고 나가니께 마음이 워떠컸슈. 집에 오믄 빨래도 해야 하고, 치아야지, 반찬도 해야 허구, 낮에는 담배 심으니께 밭에 나가야 허구. 그래도 편치 않지. 서울에다 돈을 늘어놓으믄 맘이 편해유? 잠을 지디로 못 자. 그 돈이 다 내 손에 들어와야 하는디. 그러다 장사가 커져서 쌀도 용달차로 한 30 가마씩 가네. 쌀은 최고 남아야 한 가마니에 만 원 밖에 안 남아. 그러믄 용달차 주고, 무거운 거 들고 오르내리는디 보믄 그것두 줘야 혀. 내가 덜 가져가도.
서울서 시동상, 시누들 다 살기 때문에 결국은 이름이 광천형님, 광천형수 됐어. 내 성질이 그래. 집에 애들이랑 영감 두고 온 놈이 내 혼저 칼국수나 밥 한 끼 사 먹었으면 진짜 사람 아닐세. 밭에 가믄 누가 막걸리 줘서 한 잔씩 먹으면 일 허다가 밭 매는 것도 좋아. 짱짱허니. 그래 술 한 잔씩 먹는 줄 알고 지나가믄 형수, 형수 불러다 막걸리 한 잔 주면 그놈 먹고 그만이지. 어디가 점심 같은 거 밥 한 끼 사 먹고 그런 건 읎슈.
그리구 아침저녁으로는 식당이 있어. 멀게는 일가인데 어떻게 거기 가서 식당을 합디다. 갑바만 치면 공장 그런덴데 언니 밥 묵고 가라고 하믄 밥 한 번 먹고 서르지 한 번 해주믄 되고 그러잖어. 그렇게 사람을 자꾸 알게 되갔고 아흔셋 먹은 노인네를 장사하구 다니다 사귀었어. 내가 거기서 자고 내가 딸 며느리 마냥 노인네 거둬 잡술 것도 사다 드리고 쌀 같은 것두 주고 같이 둘이 해서 먹구 그랬지. 그렇게 30년을 했응께, 몸땡이가 남겄슈? 입만 살았쥬.
내가 읎이 살아두 동네서 이웃이랑 한 식구 마냥 살아. 그렇게 한 30년 다녀갔구 논두 사구 밭도 사구. 애들 5남매 낳는데 아들 하나는 장관 같아. “언니가 낳어?” “그럼 내가 낳지 누가 낳는다냐?” 아구, 우리 아들 마흔 한 살에 어떤 사람이 졸음 운전해서 후딱 받아쳐먹었어. 딸 둘 낳구 잘 사는디. 그거 죽고 나서 그 해 지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구. 그래 한 해 둘 그렇게 보내구두 이렇게 살어유.
우리 집 양반은 오줌을 제대로 못 누구서 투석하다가 여든한 살에. 두 장정 나갈 적엔 마음이 참. 그래도 이렇게 사는디 가슴속이 꽉 차 있어유. 막내아들만 살았어두 괜찮혀. 벽제 납골당에 있슈. 내 자식이지만 누가 봐도 괜찮은디 그렇게 읎어지더라구. 그 딸들이 다 컸슈. 그것들 보구는 “어매가 해주는 것만 먹지 말고 서로서로 밥은 혀. 할매 잔소리한다고 허지 말어.” “얼라 할머니 헐 줄 알아.” 그러구 “큰 눔이 할머니 여기서 혼자 살지 말고 지들하고 살자”고 허길래 “그거는 나쁜 말은 아닌디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살던 집에서 살다 죽어야 혀.” 그랫슈. 그것들 왔다 가면 와도 마음이 안 좋고 안 와도 마음이 안 좋고.
시어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식도암 걸려서 예순네 살에. 아버님은 여든다섯에 돌아가셨는데 밀양 박씨 양반이여. 여기 임씨네가 많이 살거든유? 박씨하고 임씨하구 우리는 넘 같이 안 살았슈. 이렇게 살아. 우리 할아배 죽을 때 동네 안팎 빠지지 않구 와서 좋구, 시아즈버님도 안팎으로 와서 좋구. 내가 우리 도산1구 안팎으로 참 존경허구 미운 사람 읎어. 초상집, 혼인집, 무슨 일만 나면 사흘씩은 해야 헌께. 장사허기 전에 그렇게 많이 혔구, 장사하더라도 그날은 빠져야지.
여기 회관이 집허구 가차서 좋아. 난 지금 내 집으로 알구 살잖여. 난 여기 문 닫는 거 싫어. 형님 아우들 다 재밌게 살어유.
강금자 어머니는 1933년생으로 구항면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장곡면 도산리로 시집와 다섯 남매를 낳았습니다. 서울을 오가며 장사를 해 자식들을 키워냈습니다. 몸만 아프지 않으면 어디로든 돌아다니고 싶다는 어머니는 무언가를 붙잡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매일매일 집 바로 옆에 있는 마을회관에 가서 형님 아우들과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이 되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날 저녁, 문득 외로운 마음이 드는데 마침맞게 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자식들이 있어, 내 일처럼 돌봐주는 이웃들이 있어 어머니는 오늘도 내일 아침이 기다려집니다. 코로나로 인해 마을회관에 자주 가지 못하는 요즘 어머니의 하루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