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도반의 시
소설가는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시제는 현재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내일을 예측할 때 소설은 망한다. 오로지 과거에 눌려 지금 겪는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 동시대를 본다는 게 그런 거다. 눈앞에 절망을 맞아들이는 일 그것이 야기된 인과를 찾아 후회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를 전제해야 한다. 짐작은 ‘아마’나 ‘어쩌면’ 같은 부사에 의해 현재를 비추는 장치로만 쓰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쓴다면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가 된다. 소설가는 시인을 동경한다. 그들에게는 먼 훗날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샤먼의 후예다. 불 속에 모래를 던지며 돌이키지 못할 내일을 본다. 해안으로 밀려온 사체에 파리가 자리 잡으면 그곳에서 태어날 구더기에 눈물을 흘린다. 사멸할 운명을, 그 어쩔 수 없음을 안다는 건 일어날 고통을 오늘 느낀다는 것 시인의 아픔은 소설가의 동경이다. 사람들은 함축의 차이로 그들을 구분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잉크의 성분은 피와 눈물로 엄연히 다르다. 피는 당장 흐른다. 분명한 색을 가지고 지금을 이야기하는 반면, 눈물은 중력을 거스른다. 가슴에서 데워지고 눈으로 갔다가 자유 낙하한다. 내일을 쓰기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바다 같은 짠내만 남긴다. 예전에 울주에 가서 암각화를 본 적이 있다. 절벽 바위에 새겨진 물고기와 그물이 새겨진 생생함에 말을 잊고 바라봤다. 인간이 수렵으로 연명하던 시절 그들에게 풍요는 미래이자 현재였다. 소설가와 시인이 다르지 않았던 때 제우스가 자웅동체인 인간을 시기해 둘로 갈라놓기 전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봤었다. 한때 우리는 빛으로 존재했다. 빛은 공기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다 물속에서 속도를 읽고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굴절이란 방법을 택한다. 욕망은 빛을 유기물로 만들고 유기물은 인간이 되었다. 죽음은 굴절이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원래 하나였던 시와 소설처럼 영원불멸한 새김을 행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감사를 동시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