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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5 도강록 을해일 01]

연암 박지원의 건축관

by 백승호

6월 28일 을해일

아침에 안개 끼었다가 늦게 개었다.


1. 아침에 변계함과 함께 먼저 길을 나섰다. 대종이 저 멀리 큰 장원莊園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은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입니다. 황성皇城에도 집이 있는데, 이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집이었다네요. 종맹은 본래 탐욕스러운 관리로, 불법적인 행위를 많이 저질렀지요. 조선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서 엄청나게 부를 쌓았지요. 늘그막에 예부禮部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황성에 있던 집은 몰수당했고, 이것만 아직 남아 있답니다.”

또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은 쌍림雙林의 집이고, 그 맞은편 집은 문통관文通官의 집이랍니다.”

대종의 말솜씨가 맑은 물이 흘러가듯 거침이 없었는데, 마치 익숙한 문장을 외우는듯했다. 대종은 평안도 선천宣川 사람으로, 이미 연경을 예닐곱 번이나 드나들었다고 한다.


2. 봉성까지 삼십 리를 더 가야 하는데 옷은 흠뻑 젖었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콧수염에는 이슬이 맺힌 듯 땀방울이 송골송골했다. 마치 벼의 싹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았다. 서쪽 하늘가의 짙은 안개가 갑자기 확 트이더니, 파란 하늘 한 조각이 조금 드러났다. 움푹 파인 구멍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마치 창문에 끼워 놓은 작은 유리 같았다. 잠시 안개가 끼는 듯하더니, 상서로운 기운을 품은 구름으로 싹 바뀐다. 그 변화무쌍한 풍경 변화는 끝이 없다. 뒤돌아서 동쪽을 바라보니 한 덩어리 붉은 해가 벌써 대나무 장대 세 개 높이만큼 중천에 솟아 있다.

강영태康永太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태는 나이가 스물셋인데, 자기를 민가民家라고 불렀다. (한족을 민가라고 불렀고, 만주족을 기하旗下라고 불렀다.) 그는 얼굴이 희고 맑았으며, 서양금西洋琴"도 잘 탔다.

내가 물었다.

"글을 읽었느냐?"

그가 대답했다.

“이미 사서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외우기는 했지만, 아직 강의講義는 하지 못합니다."

학문을 익히는 데는 이른바 '송서誦書'와 '강의講義' 두 방법이 있었는데,우리나라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함께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사서장구四書章句」만을 입으로 외우기만 한다. 외우는 것이 익숙하면 다시 스승께 그 뜻을 배우는데, 이를 '강의'라고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그 뜻을 배우지 못하더라도, 책에서 배운 글귀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관화官話(청나라의 표준 한어)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온 세상의 말 중에서도 중국말이 가장 쉽다는 것은 그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강영태가 살고 있는 집은 격조 있고 화려하다. 집안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캉炕이라는 구들 위에는 용과 봉황으로 수를 놓은 털담요를 깔아 놓았고, 의자나 침상에도 모두 비단 담요를 깔아놓았다. 집 안에 있는 네모난 마당에는 나무틀을 빙 둘러 세워 주렴을 매달아 햇볕을 가렸다. 사방으로 연노란색 주렴을 드리웠다. 주렴 앞쪽에는 석류화분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 흰 석류꽃은 활짝 피었다. 또 특이한 나무 화분 하나가 있는데, 잎은 동백 같았고 열매는 탱자와 비슷했다. 무슨 나무인지 이름을 물었더니 무화과無花果라고 했다. 열매가 모두 두 꼭지씩 마주 달리고, 꽃을 피우지 않은 채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서장관書狀官 조정진趙鼎鎭이 찾아왔다. 서로 나이를 따져 보니,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 곧이어 부사 정원시鄭元始도 찾아와서 만 리 길에 함께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자인子仁 김문순金文淳이 말했다.

“형님이 이 길을 함께 가는 줄 알았지만, 국경을 건너기 전에는 여러 준비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고 바빠 미처 서로 인사도 못 나누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타국에 와서 서로 알게 되었으니 이역異域의 친구라고 할 만합니다.”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이역 사람인지 모르겠소."

부사 정원시는 나보다 두 살이 많다. 나의 조부와 부사의 조부님은 예전에 같은 학당에서 공령문功令文(과거 시험용 시와 문장)을 익혔고, 동문의 명단을 기록한 동연록同研錄에도 함께 있다. 우리 조부께서 경조당상京兆堂上(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한성의 으뜸 벼슬)으로 계실 때 부사의 조부님께서 경조랑京兆郎(육조의 벼슬아치)으로 일하면서 내 조부를 찾아뵙고, 지난날 서로 함께 공부하던 일을 이야기를 나누신 적이 있다. 내가 여덟아홉 살쯤 되었을 때였는데, 그때 옆에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고, 두 집안 간에 대대로 교유交遊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서장관이 흰 석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런 종류의 석류나무를 본 적이 있소?"

내가 대답했다.

"아니요 본 적이 없습니다."

서장관이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이런 종류의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국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지요. 대개 이런 석류는 꽃만 화려하게 피고 열매는 맺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4. 우리는 잠시 한담을 나누고 모두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압록강을 건너던 날, 갈대숲 속에서 서로 얼굴을 알게 되었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못했다. 또 책문 밖에서 이틀이나 옆 장막에서 노숙을 했지만,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오늘 이역 친구니 뭐니 하면서 서로 농담을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점심이 아직도 멀었다고 하기에 천천히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배고픈 것을 참고 구경을 나섰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는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집이 이렇게 크고 화려한지 몰랐는데, 이제 앞문으로 나가니 바깥채에 딸려 있는 방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삼사三使와 그 일행이 모두 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비단 우리 일행이 머무는 거처만 이렇게 널찍한 공간에서 여유롭게 지내는 뿐만 아니라 드나드는 장사꾼과 나그네들이 잠시도 끊이질 않는다.

또 수레 이십여 대가 대문이 미어터지게 들어온다. 수레마다 말과 노새가 대여섯 마리씩은 되었는데 시끄러운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건이 깊이 감추어져 있어 집 안이 텅 빈 듯 고요하다. 모든 것이 대체로 잘 배치되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자기만의 풍격을 지키면서도 서로 거치적거리거나 방해되지 않는다. 언뜻 외형적 형식만 보아도 이러한데, 다른 세세한 것까지는 다 말할 필요도 없다.


5. 천천히 걸어 대문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번화하고 화려했는데, 설사 연경을 가 본다고 하더라도 여기보다 더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이 이처럼 번성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거리 좌우로 쭉 늘어선 점포들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모두 아름답게 조각한 창문과 화려하게 채색된 출입문, 그림을 그려 넣은 기둥, 붉게 칠한 난간들, 그리고 푸른빛 주련柱聯,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현판들로 꾸며져 있었다. 점포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모두 청국 내지의 진기한 물건들이었다. 변문邊門이 있는 이런 궁벽한 오지 마을에도 물건을 감정하는 뛰어난 감식안이 있다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6. 또 다른 한 저택에 들어갔다. 이 집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강 씨康氏의 집보다도 더 훌륭했지만, 집의 구조는 두 곳 다 대체로 같았다. 보통 집을 짓는 방식은 반드시 수백 보의 집터를 잘 정리해서 길이와 넓이를 알맞게 확보하고, 땅을 잘 골라서 평평하게 만들었다. 토규土圭(일조량 측정기)로 햇빛이 잘 드는지 살펴보고, 나침반으로 집을 앉힐 방향을 잡았다. 그런 뒤에 축대를 쌓아 올렸다. 축대는 모두 돌층계로, 계단이 한 개짜리나 두 개짜리 혹은 세 개짜리로 되어있다. 층계는 벽돌을 쌓은 뒤 잘 갈고 다듬어 만들었다. 축대 위에 집을 세웠는데, 모두 한 일 자처럼 길쭉한 집이었다. 집 구조가 구부러지거나 곁채가 잇달아 붙지 않게 한다. 첫 번째 집채는 내실內室이고, 그다음 집채는 중당中堂, 셋째 집채는 전당前堂, 넷째 집채는 외실外室이었다. 외실 밖은 큰길에 접해 있어 객점이나 상점으로도 사용했다. 각 집채 본당 앞의 좌우에는 곁채가 있었는데, 이것이 행랑과 요사였다. 대체로 집 한 채의 길이는 기둥의 수에 따라 6 영楹·8 영·10 영·12 영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꽤 넓어서 거의 우리나라의 민가 두 채 크기만 했다. 재목은 조금도 길고 짧아서는 안 되고, 간격을 마음대로 넓히거나 좁히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자로 재어 규격에 맞추어 집의 기본 틀을 세웠다. 집채는 모두 들보를 다섯 개 혹은 일곱 개인 오량집이거나 칠량집이다. 땅에서 용마루까지 그 높이를 재어서 처마가 그 한가운데에 오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와 고랑에는 비가 오면 지붕 위에서 물병을 쏟는 것처럼 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집채의 좌우와 후면에는 불필요한 처마를 만들지 않았다. 벽돌로 담을 쌓아 올렸는데, 서까래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그 높이가 집만큼이나 높았다. 동서 양쪽 담에는 각기 둥근 문을 냈고, 문은 모두 남쪽을 향해 나 있었다. 모든 집채의 한가운데 한 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했는데, 반드시 앞쪽 문과 뒤쪽 문이 일직선으로 마주 보게 했다. 그래서 집채가 서너 겹이라면 문도 여섯 겹, 여덟 겹이나 되었다. 모든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내실에부터 외실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다 볼 수 있게 훤히 뚫려 있는데 마치 화살처럼 곧다. 이른바 옛글에서 '겹겹이 닫힌 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도 이와 같다'라고 한 것은 송 태조가 자신의 마음이 곧고 바른 것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길에서 정 3품 당상관 동지同知 이혜적李惠迪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궁벽한 시골 구석에 뭐 볼 만한 것이 많이 있는지요? “

내가 말했다.

"연경도 이 보다 더 훌륭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요."

이군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비록 크냐 작냐, 사치스럽냐 검소하냐 하는 구별은 있겠지만, 그 양식은 거의 같습니다."



[해설] 북학과 건축, 연암의 현실주의 — 『열하일기』 6월 28일 건축 묘사를 중심으로


1.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6월 28일 자에서 청나라 민가의 건축양식과 구조를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 집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강 씨의 집보다도 더 훌륭했지만, 집의 구조는 두 곳 다 대체로 같았다”라며, 청 민가의 정형화된 구조와 치수의 표준화, 합리적인 공간 배치, 높은 기술 수준에 깊은 감탄을 표한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한 여행자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낙후성과 보수적 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북벌론에 대한 우회적 반론이자 북학론의 정당성을 설득하려는 전략적 묘사로 이해할 수 있다.

연암이 이처럼 구체적으로 청나라 민가의 구조를 묘사한 목적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청 문명의 우수성을 실증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조선의 지식인층에게 청 문물 수용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자 했다. 축대의 정밀한 설계, 벽돌의 활용, 일직선으로 이어진 문 구조, 기둥 간 거리의 정확한 배치 등은 모두 합리성과 실용성, 곧 ‘이용후생’을 실현한 문명의 표징이다. 이는 유교 경세론에서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이용’과 ‘후생’의 가치를 복권시키려는 연암의 실천적 철학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2. 김명호는 이에 대해 연암이 북학론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유교적 경세 이념 안에서 인정받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가 요순 이래의 중화 문명을 계승하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특히 후자는 조선의 소중화주의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였기에, 연암은 전통적인 혈통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을 문화 중심적 화이론으로 전환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그는 청나라는 비록 '이(夷)'이지만 그 문물은 '화(華)'이며, 반대로 조선은 '화'라 자부하나 그 문물이 낙후되어 '이'에 가깝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촉구한다.


3.『열하일기』의 이 대목은 그러한 인식 전환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장면이다. 연암은 청나라 민가가 “햇빛이 잘 드는지 토규(土圭)로 측정하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아 짓는다”라고 서술하며, 건축이 과학기술과 결합된 문명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기둥 간 간격도 자를 사용해 정확히 맞추며, 구조 전체가 규격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스템화된 도시 설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설계는 단지 집의 형태가 아니라, 조선이 지향해야 할 문명의 표준과 방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문의 일직선 구조와,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투시도는 단순한 건축 기술을 넘어 정치적 은유로까지 확장된다. “겹겹이 닫힌 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도 이와 같다”는 표현은 물리적 구조를 통한 도덕적 투명성과 공정함, 즉 ‘정덕’을 상징한다. 연암에게 청나라 건축은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이용후생과 정덕이 조화를 이루는 통치의 이상을 구현한 문명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는 청 문물을 ‘이적(夷狄)의 물건’으로 간주하며 배척하던 북벌론자들의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한편, 문물 수용이 곧 도덕적 타락이라는 인식을 부정하는 지적 설득의 전략이다.

이처럼 『열하일기』 6월 28일 자에 담긴 건축 묘사는 북학의 실천 가능성과 이념적 정당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은 청 민가의 구체적 구조와 기술을 통해, 그들이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라 합리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문명국가임을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관찰과 기록은 청 문명을 도입하여 조선의 문명 발전과 생활 개선을 도모하자는 북학의 정치적 선언이자 문명적 비전이다.


4. 이러한 연암의 실용적 사고는 글을 넘어 삶으로 이어졌다. 그는 1786년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창경궁 춘당대 보조계단 설치에 참여하며 실용성과 안전을 고려한 설계를 제안한 바 있다. 선공감은 토목과 영선을 담당하는 관청이며, 감역은 그 실무를 맡은 종 9품의 직책이다. 이어 그는 1789년 평시서 주부, 다시 사복시 주부로 승진하며 도량형과 시전, 물가, 수레와 말 등의 행정 실무를 경험했다.

연암은 관직 활동 외에도 건축 실무에 깊이 관여했다. 1778년과 1802년에 걸쳐 연암골에 자연친화적 원림을 조성했으며, 1793년에는 하풍죽로당과 백 척 오동각 설계에 참여하여 관아 원림을 설계했다. 또한 1797년 면천군수로 부임한 뒤에는 골정지 연못에 인공섬을 만들고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을 건립했다. 이는 단순한 치적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이상적 자연·건축·정치의 조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가 이처럼 사상과 실천을 함께 했던 근본적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일신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개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여 이용한다.”

또한 『북학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다면, 비록 오랑캐일지라도 찾아가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언명은 연암의 북학론이 단순한 문물 숭상의 논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실용적 사상이며, 현실 개혁의 철학이었다. 연암은 이념에 갇혀 외면을 고집하기보다, 유익한 제도라면 그 출처를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정치 철학을 제시했다.


5. 오늘날 우리가 이 사상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 다시 말해 이용후생의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실용적 정치가 절실한 시대다. 이념에 매몰된 공허한 대립이 아니라,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고 국력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책과 제도적 안목이 지도자에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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