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며칠 뒤 나는 회사에 짧은 여름휴가를 냈다. 여행을 좀 다녀오고 싶었다. 이번에는 특히나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 필요했다.
어디를 다녀올까 고민하며 나는 습관적으로 SNS 검색창에 여행지에 관련된 해시태그(#) 검색을 하고 있었다. 맛집, 카페, 사진 찍을 곳 등을 찾아보며 분주하게 스크린샷을 남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라더니 "이게 맞아?"라는 의문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여행을 여행답지 않게 보내는 날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SNS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여행지에 와서 그 지역의 유명한 맛집이나 카페를 가지 않으면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이상한 심리적 압박과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 여행지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밥을 먹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바다를 등지고 서서 무던히도 셔터를 누르던 모습. 그러고 나서는 각자 SNS에 올릴 사진을 고르고 멘트를 고민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핸드폰만 만지고 있는 모습. 나에게는 아름다운 것들을 눈과 마음에 담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우 SNS 속 네모난 창 화면 안에 담겨 있는 10장 남짓한 사진과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으로 잠들던 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무의미한 여행의 반복을 뒤로하고 나는 "여행도 의미가 필요하고 쓸모가 있어야 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의미가 없고 쓸모가 없는 여행은 그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도피처일 뿐이고 그것은 나를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의 여행이 대부분 이런 모양인 듯하여 별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의 진짜 의미는 뭐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계속 무시한다면 여행뿐만이 아니라 내 삶 자체도 흘러가듯이 살아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여행의 쓸모를 찾는 것이 꽤나 중요한 미션이 되었다.
지난 유럽 배낭여행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행으로 기억된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여행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나에게는 의미가 컸던 여행.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때의 사진을 1-2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여행지에서의 경험보다도 마치 어제 다녀온 여행처럼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호스텔 조식으로 점심까지의 끼니를 다 해결했고, 택시 탈 돈이 없어 하루에 2만 보 가까이를 걸어 다녀도 그저 즐거웠다. 그렇게 걸어 다니며 우연히 만났던 골목골목 귀여운 가게들과 자신들만의 언어로 눈인사, 손인사를 해주던 사람들. 그 당시의 내 핸드폰은 관광지 앞에서 건진 멋진 인생샷들이 아닌, 여행지에서 느꼈던 순간의 기분과 감정들을 기록한 메모장으로 가득했다.
유명한 작품들을 감상하다 새로운 영감이 불쑥 떠오르면 그때마다 적어두었던 메모들. 여행지마다 만났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짧게 기록해 둔 일기들. 이 글들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생경한 그때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나만의 사진첩인 셈이다.
그림도 잘 못 그리는 내가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사서 공원에 한가로이 누워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세느강변에 앉아서는 마치 작가라도 된 양 사색에 빠져 나만의 소설 작품을 써 내려가 보기도 했다. 미술관을 지나치지 못하던 나를 보며 마치 “나에게는 예술가의 기질이 숨어있는 게 분명해”라고 중얼거렸고 이런 이유 모를 예술적 자신감으로 충만해지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한평생 미술과는 가까이해본 적도 없는 나였는데 말이다.)
비싸고 맛있는 걸 먹지 않아도 배불렀고, 공원에 누워 나무들을 보면서 “몇 백 년 된 나무일까, 몇 천 년 된 나무일까?” 친구와 이야기하며 장난치는 게 좋았다. 버킹엄에 있는 웨인 매너 (영화 ‘베트맨 시리즈’ 속 브루스 웨인의 집)에 놀러 가서는 “진짜 베트맨이 있다면?”이라는 무한한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고담시의 시민이 되어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나’ 일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들. 그게 너무 좋았다. 나이, 내가 하는 일, 학교 등 나를 소개하기 위한 ‘타이틀’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러한 타이틀 따위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꿈 많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들여다 보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던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니 이것이 여행의 쓸모가 아닌가 싶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누가 뭐라 해도 멋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중했던 기억을 뒤로한 채 나는 어느새 현실에 치여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저 그런 보통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여행조차 나의 의지가 아닌,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정보와 주변 사람들의 입김 속에서 방황하는 모양새라니. 나는 어느새 자유 의지는 완전히 결여된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남들이 하니까 다 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내 내면을 돌아보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 나는 그것을 여행의 쓸모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모든 여행이 쓸모 있고 의미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런 여행이 필요했다. 나를 찾을 수 있는.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쓸모 있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꽤나 중요한 의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무작정 강릉행 티켓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