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토요일 오전.
부리나캐 집을 나섰다.
"뭐 바쁜 일이 있남?"
민규는 속으로 자문하며 뒷모습만 남긴 채 아파트 사이로 골바람 세차게 온몸으로 받아가며 달렸다.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은 언제나 그리했듯이 잔잔한 강물 위로 차분하게 걷는 기분이었다. 물 위로 걸어보았는가? 물에 빠지지않기 위해서 한 발이 물에 닿는 순간 즉각적으로 다른 발을 들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물에 빠지기 전에 발을 교대로 옮기다 보면 물 위로 걷는 일이 가능해진다. 물론 논리적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덕소를 지나 양수리까지 차는 민규를 데려다 주었다.
잠시 한 구석에 차를 세워두고 네*버 지도와 카**지도를 열어서 가볼만한 카페를 검색해본다. 양수대교 옆으로 카페가 줄지어 서있다.
한강과 디리 그리고 푸른 초원이 마당으로 펼쳐진 로터**카페 안으로 발을 들어놓았다.
메뉴에 소개된 음료수 가격이 만만치않다.
"흠. 자릿세가 엄청 반영되었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전을 뽑을 수 있을까?"
갑자기 머리 속이 계산기로 덮인다. 속물근성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민규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해서 가장 저렴한 아아로 주문했다.
그리고 잔디가 널따랗게 널브러진 그러나 덩그라니 나무 혼자 서 있는 그곳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아아가 나오길 기다리며. 별로 바쁘지않은데, 주문한 것을 기다릴 때에는 공연히 조바심이 생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양수대교 위로 시선을 던지려는 순간 벨이 울린다. 허겁지겁 민규는 아아를 받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짙은 고동색과 검은 색이 하얀 얼음과 뒤섞여 햇빛을 투과하니 민규 손도 애매모호한 색상으로 물든다. 다시 벤치로 돌아와 앉아 조심스럽게 두손으로 커피잔을 감싼다. 빨리 녹지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준비해 간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첫페이지를 열었다. '당구 점수기록원의 수기'가 목차 맨위를 차지하고 있다. '두시를 지나 세시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신사들은 당구를 치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그래 당구도 인생과 같지... 누구는 작은 당구대 안이 우주의 심오한 원리가 담겨있다고 말했는데.. ' 민규는 중얼거리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런 광경이 나에게 그려지길 바랬던가. 단돈 6,000원에 아아를 시켜 두손에 들고 푸른 잔디위 벤치에 앉아 양수대교 아래 흐르는 남한강을 응시하며 카페주인이 마치 자기자신인 듯 고요한 흥분에 젖는다.
한 두시간 흘렀을까? 책은 오른손에 들려있었고 왼손은 책갈피를 넘기다가 다섯번째 장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사람은?'
민규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나도 사람인가? "
사람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무엇인가에 쫓기듯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강물은 쉬임없이 흐르고 기울어져가는 붉은 태양이 반사되 온통 세상은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낭에서 만났던 태양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그 태양과 같을까?'
돌연히 수억년 우주역사를 지탱해온 하나의 태양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닌 것 같은데. 남한강에서 만나는 태양이 더 크고 붉은데.. '
민규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뒤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양수대교 초입에 접어들면서 연락했던 그 친구의 발자국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비록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 소리가 조금 더 크게 귓바퀴를 움직이게 되자 민규는 벤치에 앉은 채로 상반신을 휙하고 돌렸다.
직감이 적중했다.
그녀였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살짝 들쳐진 코트 안으로 보이는 짧은 미니스커트. 그 아래 은빛 색깔의 스타킹이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왔어? 이리 곁에 앉아."
그녀는 비시시 입가에 웃음을 담은 채 벤치로 다가와 앉았다. 민규는 잠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자리잡도록 도운 뒤 묻는다.
"뭐 마실래?"
그녀는 페퍼민트를 좋아했었다. 지난 십년간 우리 둘이 만나면 늘 그랬다.
"응 그것"
"알았어 주문하고 돌아올께."라고 대답한 뒤 민규는 자리를 떴다.
안녕하세요. 페퍼민트 한잔을 키고 왔을 때 그녀는 영혼이 가출한 것 같았다.
벤치 모퉁이에 걸터 앉아
파란 하늘과 강물 사이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 4분의 3은 이미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입은 미색 코트는 파란 강물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파란 하늘도 그 위에 덧칠을 해 놓았다.
"자 여기 그대 차"
민규는 그녀에게 페퍼민트를 건넸다.
그제서야 그녀는 허리를 펴서 민규를 바라보았다.
두사람은 두손을 잡는 대신 건네주던 페퍼민트를 서로 감쌌다. "이리 따뜻한데 나도 이것은 주문할껄.. 차디찬 아아를 시켜가지고."
그의 써늘한 한마디를 듣고 그녀는 그의 손을 포근하게 감쌌다. 어느때보다 더 따스함이 그녀의 손끝을 통해 나의 전신에 퍼지는 것 같았다.
"잘 지냈어?무슨 책을 읽고있었어?"
그녀는 언제나 그가 읽는 책에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한 3학년 예비역인 민규는 대학교 1학년 어린시절이었던 그녀를 만났다. 여섯살 차이. 그러나 두 사람은 은 나이차와 학년차를 잊었다. 사십대 중반이 된 그녀는 지금도 나보다 성숙해보인다.
"나는 톨스토이(Tolstoy)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가 더 좋아."
그녀는 늘 그랬다.
"그래 톨스토이! 또?"
그는 그렇게 반응하는 그녀가 항상 좋다.
아직까지 민규가 결혼을 하지않고 살아가는 것. 그녀도 마찬가지로 혼자 지내는 것. 굳이 독신주의도 아니고 비혼주의자도 아니면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만나 삶을 즐긴다.
"나는 그대가 옆에 있는 양수리가 좋아."
민규는 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검지와 장지손가락으로 다듬으면서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는 그의 어깨 위에 기대어있다.
"그런데 우리 왜 결혼도 하지않고 이렇게 만나고 있지, 참...그래도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보니 잠자리도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우리서로에게 한번도 요구를 안했어. 선배 그렇지?"
"듣고보니 그러네. 왜 그랬지,
오늘이라도 ... 이대로 좋아서 그랬겠지.
그대 자체가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은 강물로 돌렸다. 한시간 이상 흘렀다.
"우리 밥 먹으러 갈까?"
그녀는 나의 팔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순간 민규도 기우뚱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그녀는 웃으면서 간신히 두발로 수직으로 자리를 잡은 나를 보며 자신의 입술을 내 뺨에 대었다. 그도 그녀에 볼에 입술을 댔다.
민규는 그녀를 차에 태웠다. 곁에 앉은 그녀는 블루투스로 음악을 튼다.
모짜르트 소나타 12번 3악장.
"분위기에 어울리는 식당이어야 할 텐데."
음악을 들으며 맛집을 민규는 검색하기 시작했다. "늘 선배가 준비했는데, 오늘은 준비를 못했구나."
"아구찜 좋아하지?"
"좋지 어디 맛집 찾았어?"
"여기 하나 있는데 후기도 좋아."
"그럼 그리로 가자."
민규는 자신의 제안에 언제나 흔쾌히 동의하는 그녀가 좋다. 한번도 "아니야!"란 단어를 그녀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맛있게 아구찜을 먹었다. 가끔 민규의 입술에 묻은 빨간 양념을 그녀는 물휴지로 닦아주고 민규는 아구를 잘게 나누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기를 반복한다. 누가보기에는 바람난 중년커플이거나 늦게 결혼한 신혼부부의 모습이다.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 다시 강변을 따라 차는 이동했다. 양평을 지나 용문으로 접어들었다.
"우리 어디 가요?"
그녀는 핸들을 잡은 민규의 손에 자신의 왼 손을 올려놓으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민규는 그녀의 왼 손 위에 자신의 왼 손을 얹었다.
"그대에게 청혼할 장소로 가고 있어."
낯선 음성에 그녀는 민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규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젠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어. 벌써 25년이나 흘러갔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같았어."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왼 손 위에 민규의 왼 손이 얹혀있었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민규의 차는 강가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있는 강가의 작은 오두막 앞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민규는 "잠간 여기에서 기다려."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향해 이동했다.
잠시후 민규는 그녀를 데리고 세번째 오두막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민규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민규의 뒤에는 백합,장미, 튤립 그리고 안개꽃이 꽃들을 포근히 안은 채 가지런히 탁자 위에 놓여있었고 벽에는 언젠가 두사람이 서로 안고 찍은 사진이 대형(大型)으로 인쇄되어 "세상 끝날까지 우리 함께 하자. 나와 결혼해줘!!!"라는 글귀와 함께 커다란 플랭카드가 걸려있었다.
무릎 꿇은 민규 앞에 그녀도 함께 무릎을 꿇고 민규를 안았다. "선배의 고백을 듣기까지 25년이 지났네요. 고마워요. 고백해주어서. 사실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선배가 나보다 하루 먼저 했네요."
민규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품에 안고 말한다.
"빠른 시일 내에 결혼식을 올리자. "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안은 두 손은 한참동안 풀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