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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Sep 19. 2024

사장이 없을 때는 놀아, 알바생

저도 남편 없으면 좀 놀겠습니다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의 가장 명장면은 무엇일까? 


도깨비 몸에 깊이 박혀 천년도 만년도 더 갈 것 같던 지긋지긋한 검이 뽑혀 결국 도깨비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무로 돌아간 장면이 아닐까. 혹은 피지컬이 끝내주는 도깨비와 저승이 두 남자 (공유와 이동욱)가 합심해 사채업자로부터 은탁이(김고은)를 구해내는 장면일까? 아니면 도깨비와 마침내 결혼을 약속한 지은탁이 스무 남짓한 유치원생들을 지키기 위해 비탈길을 미친 듯이 돌진하는 차를 피하지 않은 탓에 사고로 명을 달리하는 장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덕화(육성재)의 몸에 들어간 신이 인간들이 마음대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일장연설을 한 후 수많은 나비로 변하여 흩어져 날아가는 장면일까?


이 드라마의 장르가 판타지물임을 잊지 말라는 듯 놀랍고 환상적인 장면들이 잊을만하면 등장하니 명장면을 하나하나 꼽아 말하기 힘들 정도지만 내가 생각한 명장면은 뜻밖에도 위에 나열한 장면에는 없다.


조금 어이없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고 또렷이 기억나는 대사는 바로 사장 써니와 지은탁의 소소한 대화 장면에 있다.


치킨집 사장 써니(유인나)가 볼일이 있다며 잠시 가게를 비우겠다고 하자 알바생 지은탁은 사장님이 안 계셔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인나는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듯 정색을 하며 은탁에게 이렇게 말한다.





은탁 - 어디 가시게요?


써니 - 그런 멘트는 사장 전용이야. 알바생 넌 나 없을 때 땡땡이치고 놀면 돼.


은탁 - 에이~ 사장님 안 계시다고 땡땡이 치면 어떡해요. 안 보일 때 더 열심히 해야지.


써니 - 안 보일 때 더 열심히 하면 사장은 몰라. 알바생 놀아!




크으... 이런 사장님을 두고 요샛말로 쿨내가 진동한다고 하던가.

작사김이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장면에서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알아줄 이 하나 없고 고작 해봐야 지나가는 개미뿐인데 개미가 말을 할 줄 알아서 사장에게 알바 칭찬을 해줄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한들 죄다 헛일 아니겠는가.


바로 이것이 내가 아픈 다리를 애써 무시하고 이를 악물고 싱크대 앞에서 꿋꿋이 일하는 이유다. 남편이 출근하기 약 15분 전이기도 하고.  


남편이 출근해버리고 나면 아무리 동동거리며 애써 일한대도 나의 고생은 남편이 알아주지 않는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눈을 집에 두고 출근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알겠는가. 내가 집에서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그렇다고 남편이 있는데도 에라 모르겠다며 배포 좋게 대자로 누워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기는 또 개미 똥꾸멍만큼 남아 있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입장을 바꾸어 빨간 날인데도 나는 출근을 해야 하고 남편은 집에서 쉰다 가정하고 머릿속에 모습을 그려보면 남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편케 앉아 핸드폰 화면이나 위로 아래로 까딱까딱 움직이는 남편의 꼬락서니를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와, 팔자 늘어졌네. 나는 돈 벌러 나가는데 가만히 앉아서 저리 노닥거리는 꼴이라니.' 하며 아무리 이해심 많은 나라 하더라도 한 0.1초는 남편이 곱게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남편 또한 말은 안 해도 집에 있는 아내가 부럽기도 하면서 좀 얄미울 테지.

사지 육신 멀쩡허니 건강한데 가정을 위해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생각은 않고 그저 배 째라 집에서 놀고 앉아있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만 해보아도 그 마음 너무 알겠는데 남편이라고 뭐 다를까. 남편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고.




사실 요새 들어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 가서 알바라도 하면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안주하는 내가 좀 한심스럽고 답답하고 꼭 바보가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이 무수한 날들을 집구석에서 매번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타성에 젖어 사는 게 맞는 건가 싶다가도 경력이 단절된 내가 어디 가서 새까맣게 어린 상사한테 지시받으며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할 걸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니 '됐다, 그냥 말자.' 싶은 마음이 더 들었다.

그렇게 요즘 내 삶은 하루하루를 좀먹는 삶인데 오늘은 더 그런 날이었다.


내 마음이야 좀을 먹든 말든 출근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 내 일말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옴으로써 살림에 보탬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내가 마냥 놀고먹는 건 아니다 하는 모습을 피력하고 싶었다.


남편은 이제 곧 출근할 테니까 집에 없는 남편은 집에서 내가 무얼 하는지 볼 수 없다. 그러니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서 마음으로나마 남편을 응원하자 싶어 나는 더욱 열심히 주방을 서성거렸다. 추석이라고 나름 기분 낼 겸 하필 굴비를 구웠더니 프라이팬 닦는 건 오늘따라 더 힘이 든다.


열심히 집안일을 하지만 말 안 하면 모르니까 행동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기 힘드니까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다. 그래도 괜히 찔리는 마음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남편은 생각지도 않은 사안을 나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물었다.


"... 그래도 애들만 집에 있는 것보단 내가 집에서 애들 데리고 있으니까 일할 때 자기 마음은 편해?"


이건 뭐 거의 답정너의 최고봉이다.

답은 정해졌고 다 알려줬으니까 그렇다고 넌 대답만 해. 편하다고 대답해. 세상 이렇게 마음이 편해도 되나 모를 정도라고 대답하라고.


그러자 내가 딱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 버금가는 대답이 남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럼, 자기가 음... 자기가 집에 있으니까 음... 자기의 존재만, 존재만으로도 든든... 하지."


"그런데 왜 맘에 없는 말 할 때처럼 말을 그렇게 버벅대는 거야?"


나의 혹시나 하는 노파심은 역시나가 되어 허탈함에 바보 같은 웃음을 웃는데


"근데..."


라고 남편이 앞의 그 흔쾌하고 내 맘을 편케 해 주는 말의 정반대 의견을 내기 위해 "근데"라고 접속사 하나를 추가로 말했다. 불길하다. 어딘가 싸한 느낌이 몰려왔다.


"아냐. 거기까지! 굳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면 좋겠어. 거기까지가 난 딱 좋아."


라며 입을 제발 다물어달라고 부탁했건만... 기어코 끝내 입 밖으로 내뱉고 마는 남편.


"너무 퍼져 있지만 않으면 좋겠어."


굳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또 또 하고야 만다. 으이그...

내가 집에 아이들과 같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딱 거기까지만 말하면 좋았을 걸 왜 뒤에 말은 붙여가지고...


실컷 좋은 소리 다 해주고는 괜한 말을 덧붙여 앞의 좋은 것은 다 까먹는 남편이다.

역시 남편은 내편이 아니라 남의 편인 것인가.


내가 아무리 집안일을 열심히 해도(물론 나의 기준과 남편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성에 차지 않는 남편 되시겠다.


그러니 나의 쉼은 앞으로 내가 챙기련다.



저도 이제 남편이 집을 비우면

좀 놀도록 하겠습니다. ;-)  




https://youtu.be/qXC833Pmi48?si=4-EUBSd916EQHNzI

한때 주부들이 매우 공감했던 박카스 광고 전업주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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