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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순천에서의 겨울 특급 낭만

온화한 동네에서 맞이하는 추운 계절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사실 지난 추석 때까지도 크게 춥지 않았다.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포근했다. 순천은 남쪽 끝에 자리한 도시답게 겨울에도 따뜻하다. 흔히 제주도를 가장 따뜻한 지역으로 꼽지만, 순천 역시 날씨가 온화하다.


순천으로 이사를 오기 전, 이 지역을 알아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말은 '순(順)'과 '천(天)'이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는 이름처럼, 이 도시는 자연의 질서 속에 조용히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순천은 큰 태풍이나 홍수 피해가 적고, 하늘이 고르게 복을 주는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제주도에 살 때는 여름이면 태풍, 겨울이면 폭설로 고생이 많았다. 방송 작가로 일하던 시절, 폭설 속에서도 재난방송을 해야 했기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의 겨울은 내게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순천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 눈이 내려도 잠시 흩날릴 뿐 쌓이지 않는다. 남편은 차량 운행을 하는 직업이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불안이 거의 없다.


2023년 8월 말, 순천으로 이사 온 뒤 어느덧 사계절을 모두 보냈다. 겨울의 온화함, 봄의 꽃, 여름의 푸름, 가을의 단풍이 고루 어우러진 도시. 자연이 잔잔하게 숨 쉬는 이곳에서 마음도 차분해졌다. 나는 이제 순천의 시민으로, 사계절을 고요히 맞이하며 다시 2025년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기온이 뚝 떨어졌고 11월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찬바람이 몰려왔다. 지난 10월만 해도 반팔을 입을 정도로 따뜻했던 날씨였기에, 지난 3일의 겨울 추위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순천에서 겨울을 기다리며

IE003543463_STD.jpg 텐트 장만


순천에 이사 와 그동안 아파트 생활을 했을 때는 난방 걱정이 없었지만, 올해 봄 상가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대비가 필요했다. 초겨울 기운이 스며들던 어느 날, 결국 텐트를 장만했다. 아이들방과 부부용 두 개였다.


처음엔 아이들이 "텐트에서 자지 않을래!" 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방 안에 텐트를 다 치고 완성하자,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우리도 여기서 잘래요!"


난방 용품으로 만든 텐트가 방 안에 또 다른 방을 만들었다. 아니, 아이들에게 아늑한 침실과 함께 놀이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할 게 있는지 자기들끼리 자꾸만 깔깔 대며 웃는다. 둘이서 무언가 비밀 작전을 펼치듯 즐거워하는 모습. 이후에 아이들의 모습을 살펴봤더니 안에서 과자도 먹고, 스마트폰도 보며 깔깔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지긋이 미소 지었다.


오늘은 기온이 더 떨어졌지만, 텐트 안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다. 남아 있는 모기도 막아주고, 차가운 바람도 막아주니 한겨울까지 거뜬할 것 같다. 텐트로 맞이하는 첫 겨울, 추위를 피하려 마련한 이 장치가 오히려 우리 가족을 더 가깝게 만들어 주며 더 따뜻하게 감싸준다. 어쩌면 이게 텐트가 주는 특급 겨울 낭만이 아닐까.


IE003543464_STD.jpg 텐트를 치다


이렇게 우리는 겨울을 맞을 또 다른 준비를 마쳤다. 순천의 겨울은 텐트 하나로도 추위를 견딜 만큼 온순하다. 그래서인지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눈 덮인 도로의 낭만은 없지만, 대신 맑은 공기 속에서 자유롭게 거리를 오가며 느끼는 평온함이 있다. 가로수의 짙은 녹음이 아직 남아 있는 길을 걷다 보면, '그래, 이게 순천의 낭만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 가족은 이 도시의 겨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하얀 눈의 낭만 대신, 따뜻한 공기와 아늑한 텐트 속 웃음으로 채우는 겨울. 그것이 바로 순천의 사계절이 주는 가장 따뜻한 선물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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