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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Feb 14. 2024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006.

법정 스님의 에세이 ≪무소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님이 버스를 타려고 막 뛰어가는데 버스가 가버렸어요. 원망스럽지요. '조금 더 빨리 나올 걸'하면서 마음이 후회스럽고 불편합니다. 고통이 생긴 것이지요. 그때 법정 스님은 '아, 내가 너무 빨리 왔구나. 내가 탈 버스는 뒤에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떠난 버스가 자신이 탈 버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을 짓는 행위입니다. 버스는 그냥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말이죠. 상을 짓는 행위,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해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입니다. 평등한 세계를 자기 뜻대로 소유해 버리는 것이죠. 자기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버스를 보고, 내가 탈 버스라고 내 마음속에서 정해버리는 그것이 바로 '소유적 태도'이자 '상을 짓는 태도'이지요.
……(중략)……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중략)……
요약하자면,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 잘 맞지 않는데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관찰시키려 하는 것이 집착이지요. 집착은 고통을 낳습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업이 쌓이고 결국 윤회의 틀에 갇히게 돼요. 불교에서는 그래서 '실상'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 본 책, 138~140쪽

똑같은 양의 커피를 마시던 두 사람이 잔을 바라봅니다. 한 사람은 아직 반이나 남았네,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합니다. 보다시피 표현하는 말은 이렇게도 다른 의미를 갖는데, 남아 있는 커피의 양은 동일합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왜 우리는 이처럼 서로 다른 표현을 쓸까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때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마도 사람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말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고, 또 이 말을 통해서 타인의 생각을 전해 듣습니다.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말로 인해 일어나는 분란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구의 생각이 그르다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혹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현상이라도 충분히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에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유래된 말이 일체유심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인용한 책의 내용 속에서 버스를 놓쳐버린 법정 스님은 일반인과는 뭔가가 다른 궤적의 사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그러니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분명 가 버린 버스에 더 집착을 보이기 마련일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방금 전에 가 버린 버스에 오를 수 있었을 테고,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버스를 기다리면서 바보처럼 시간만 낭비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본 책의 저자인 최진석 교수는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말로써 형상을 짓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해버리면 바로 거기에서 집착이 생겨나고 이 집착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기준을 세우는 일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혹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때의 기준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면 무방할 테지만, 사실은 기준에 부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해 내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기준은 곧, 그 기준을 부합하지 못하는 사물 혹은 사람 혹은 생각 등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서로 다른 이념과 생각을 지닌 정치인 A와 B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A 정치인에게는 고정적인 지지자층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B 정치인에게도 지지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때 앞에서 말한 '기준'이란 건 바로 그 특정한 정치인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겠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A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은 A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B 정치인 지지자들)을 틀렸다고 단정 지어 버립니다. 그건 B 정치인 지지자층에게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이 하나의 폭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그리고 말이 지어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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