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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n 27. 2024

커피 한 잔의 여유

#7.

대뜸 커피 한 잔의 여유라고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 봅니다. 나른한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긴다고 하니 새삼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직 엄연히 일과 시간 중인데 말입니다. 감히 여유가 어떠니 저떠니 따질 때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내막은 이렇습니다. 초저녁 시간에 치과 정기 검진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제시간에 갈 방법이 없어 아이들을 집에 보낸 뒤에 곧장 조퇴해서 학교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신호등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역으로 가는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면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교 시간에 마구 쏟아져 나오던 아이들을 뚫고 신호를 무시한 채 무단횡단을 해야 하니까요. 눈물을 머금고 가 버린  버스를 마냥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게 한두 번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얼른 버스정보시스템 앱을 열어 다음 버스 도착 시각을 검색해 봤습니다. 무려 1시간 25분 뒤에 그다음 버스가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이미 조퇴하고 학교를 나선 상황이라 다시 학교로 들어가기는 애매한 시각이었습니다. 최소한 75분을 보낼 만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자주 가는 커피숍은 학부모들이 많아 막상 가려고 해도 괜스레 눈치가 보입니다. 당당하게 복무를 상신한 상태지만, 그래도 일과시간이라 망설여집니다.


아무도 가지 않을 만한 작은 커피숍에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앉은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자주 마시는 바닐라 라떼 한 잔을 시켰습니다. 조금 쓴 게 흠이긴 해도 이 시간에 이런 여유를 누리고 있다는 게 가히 나쁘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버스를 놓친 게 신의 한 수였던 셈입니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던 강냉이를 줘서 입이 잠시 즐겁기도 했습니다. 한 잔의 커피, 한 자락의 여유, 이것도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사진 출처: 글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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