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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l 05. 2024

똑같이 생긴 사람

현재 시각 8시 50분, 지하철이 들어오는 알림 소리가 구내방송으로 송출됩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일단 발부터 들여놓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욱여넣어 봅니다. 발부터 들인다는 표현이 이때에는 딱 맞는 표현입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늘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어쩐 일로 빈자리가 보입니다. 대체로 이 시간대면 자리를 잡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다소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간인 데다 시내에서 놀다가 아마도 아직도 통근 시간이 있는 여성분들이 조금은 이르지만 귀가하는 시간인 탓에 늘 붐빕니다. 물론 이 시각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더 복잡해지는 게 지하철입니다.


게다가 더 다행인 건 딱 하나 남은 빈자리를 눈여겨보고 달려오는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저는 앞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일단 엉덩이부터 밀어 넣고 봅니다. 좌석에 몸을 붙이고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앞으로 향하다 화들짝 놀랐습니다.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무려 31년 전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얼굴이 바로 맞은편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터져 나오려던 외마디 소리를 간신히 참은 저는 우선 흐릿해진 안경부터 벗어서 윗옷 가장자리로 닦아 봅니다. 하루 종일 저의 눈이 되어 주다 보니 제법 흐릿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분명 저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경이 말끔히 닦인 걸 확인한 후 다시 썼습니다.


안 보는 척하면서 틈만 나면 그 여자분을 흘깃흘깃 쳐다봤습니다. 두상은 완벽히 그녀와 똑같았습니다.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뒤로 묶고는 머리 집게로 고정을 시키며 다니던 습성까지 빼다 박았습니다. 게다가 교제 기간 중 늘 저의 놀림거리 대상이었던 작은 눈도 같습니다. 또 그녀가 늘 쓰고 다니던 안경과 같은 재질의 안경을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 여자분도 쓰고 있었고, 심지어 가만히 앉아 있는 얼굴 표정까지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입니다.


얼핏 그런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마다 사람의 생김새는 다르다지만, 지구상에는 '나'를 닮은 사람이 저까지 포함해서 세 명은 있다는 얘기를 말입니다. 차라리 앞에 앉은 여자분이 그 셋 중의 한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어쨌건 간에 제가 죽을 만큼 사랑했던 그녀는 아니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 한편에 무슨 미련 따위가 남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 아무리 많이 본들 두세 번도 마주칠 일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던 그녀가 지금의 이 늙수그레하고 초라한 데다 볼품없이 나이만 들어버린 저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녀도 지금 쉰이 넘었으니 어쩌면 그녀 또한 저와 마주치는 일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략 오 분 동안 앞에 앉은 여자분을 관찰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 연인이었던 그녀는 아니었습니다. 지구상의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세 사람 중의 두 번째 사람인 모양입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볼 때도 있습니다.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마주쳤으면 하는 마음까지는 없습니다. 인생사가 다 그렇듯, 그냥 이런 경우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게 서로에게 최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언젠가는 똑같이 생긴 그 세 번째 사람을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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