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최근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자주 봐서 그런지 8분 하면 일단 태양부터 떠오릅니다. 왜 난데없이 태양이냐고요? 태양이 어느 순간 소멸해도 약 8분 동안은 우리가 햇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8분 전에 태양이 소멸하기 바로 그 직전에 지구로 발산했던 그 광선이 8분 후인 지금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8분이 지나면 온 세상은 암흑 천지로 변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늦은 시각인 지금, 저는 지하철역 대합실에 와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앙로역에서 오는 설화명곡 방면 지하철이 제가 있는 이곳 월촌역에 8분 뒤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뜨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약간의 설렘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8분만 있으면 제가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짧은 8분의 시간이 제게 주는 설렘의 느낌이 은근히 싫지 않습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살포시 일어난 설렘의 느낌이 8분이 채워져 가는 동안 점점 짙어집니다.
이 시간에 누굴 기다리냐고요? 군대 가 있는 제 아들입니다. 오늘 외박을 나온다고 했거든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나이라면 아내를 기다리는 게 맞지 않냐고, 아내에게서 설렘을 느껴야 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저처럼 결혼해서 20년 아상 살아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나이에 아내를 보고 설렌다면 그건 어쩌면 병원에 가야 하는 징조라는 걸 말입니다.
어떤 부부가 길을 가던 중,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내가 남편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했답니다. 아니 손을 잡고 걸어가자고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부부 사이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아무리 우스갯소리라도 사실 이 정도가 되면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살을 맞대고 오랫동안 살아온 아내에게 설레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에게 설레야 하는 걸까요? 만약 다른 여자를 보고 설렌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원에 가봐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건 간에 저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건, 제 아들과 꽤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녀석이 고등학생 시절에는 까칠해져서 쉽게 다가가기가 힘들었지만,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체감하는지, 아니면 이 시대에 남자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그 무게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22살이 된 지금은 저와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설렐 수밖에요.
"아빠, 나 오늘 집에 간다. 이따 집에서 봐."
학교에서 일을 하다 가령 이런 톡이 날아오는 걸 보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그 마음은 흡사 24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나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되고 맙니다.
설마 아들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게 비정상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녀석과 저와의 사이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늘 지금 같이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꾸역꾸역 보낸 보람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행복하고 마음이 여유로운 깊은 밤을 맞이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