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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l 18. 2024

8분의 설렘

8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최근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자주 봐서 그런지 8분 하면 일단 태양부터 떠오릅니다. 왜 난데없이 태양이냐고요? 태양이 어느 순간 소멸해도 약 8분 동안은 우리가 햇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8분 전에 태양이 소멸하기 바로 그 직전에 지구로 발산했던 그 광선이 8분 후인 지금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8분이 지나면 온 세상은 암흑 천지로 변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늦은 시각인 지금, 저는 지하철역 대합실에 와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앙로역에서 오는 설화명곡 방면 지하철이 제가 있는 이곳 월촌역에 8분 뒤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뜨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약간의 설렘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8분만 있으면 제가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짧은 8분의 시간이 제게 주는 설렘의 느낌이 은근히 싫지 않습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살포시 일어난 설렘의 느낌이 8분이 채워져 가는 동안 점점 짙어집니다.


이 시간에 누굴 기다리냐고요? 군대 가 있는 제 아들입니다. 오늘 외박을 나온다고 했거든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나이라면 아내를 기다리는 게 맞지 않냐고, 아내에게서 설렘을 느껴야 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저처럼 결혼해서 20년 아상 살아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나이에 아내를 보고 설렌다면 그건 어쩌면 병원에 가야 하는 징조라는 걸 말입니다. 


어떤 부부가 길을 가던 중,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내가 남편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했답니다. 아니 손을 잡고 걸어가자고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부부 사이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아무리 우스갯소리라도 사실 이 정도가 되면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살을 맞대고 오랫동안 살아온 아내에게 설레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에게 설레야 하는 걸까요? 만약 다른 여자를 보고 설렌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원에 가봐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건 간에 저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건, 아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녀석이 고등학생 시절에는 까칠해져서 쉽게 다가가기가 힘들었지만,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는 체감하는지, 아니면 시대에 남자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무게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22살이 지금은 저와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설렐 수밖에요.

"아빠, 나 오늘 집에 간다. 이따 집에서 봐."

학교에서 일을 하다 가령 이런 톡이 날아오는 걸 보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그 마음은 흡사 24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나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되고 맙니다.


설마 아들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게 비정상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녀석과 저와의 사이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늘 지금 같이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꾸역꾸역 보낸 보람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행복하고 마음이 여유로운 깊은 밤을 맞이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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