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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l 20. 2024

죽음에 대한 생각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흐림


제사를 지내면서 조금은 엉뚱한 것을 생각했다. 미래의 내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죽은 후의 모습이겠다. 일단 이성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만 모든 게 멈출 뿐이지, 다른 건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 그건 내가 꽤 이름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아예 주변에 인지도라고는 없는 그저 흔해 빠진 사람 중의 한 명일 뿐이니, 내가 가고 난 자리는 의외로 깨끗할 것이다. 슬픔에 젖어 몇 날 며칠을 침울해 있을 사람들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 기일 때마다 나를 기리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고작 이 따위로 살아와 놓고 그런 걸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테다.


사실 예전엔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내가 죽으면 진정으로 울어 사람이 과연 명이나 될까, 하고 말이다. 그런 유치한 생각이 가능했던 건 아마도 그때는 나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슬퍼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만큼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없다. 뉴스나 TV 등에서 보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일일이 슬퍼하거나 애도를 하지 않듯이 나의 죽음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 어느새 반백 년 넘게 살아온 입장에서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령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다고 해도 변하는 없다. 마찬가지로 명도 울지 않는다고 해도 이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같다.


아직도 그때가 엊그제처럼 생각이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돌아다니던 사람이 당장 오늘 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로 확실히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은 이후에는 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큰 미련과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한다. 미련과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내일 당장 죽기라도 할 듯 최선을 다하여 대하라고 말이다. 사실 그것도 말도 안 된다. 말처럼 그게 다 되면 그것이 어디 사람의 인생이겠는가?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몇십 년 후 내가 가고 없는 자리가 어떨지 생각해 본다. 맞다. 고독사만 아니면 된다. 죽을 때 누군가와 함께 죽을 수는 없다고 해도 죽은 뒤 오랫동안 방치되고 마는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내가 결정을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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