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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04. 2024

빨래를 개다 문득

36.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본 책, 34~35쪽

빨래를 개다 아내의 너덜너덜한 속옷이 눈에 띕니다. 옛날처럼 못 먹고살던 시절은 아니라고 해도, 일반적인 소시민의 삶이라면 속옷이 금세 낡았다고 한들 마치 손바닥을 뒤집어엎듯 새것을 장만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물론 그것은 적어도 제 아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요. 처음엔 원형의 형태가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을 와이어가 휘어져 보입니다. 그 와이어의 탄성 때문인지 어느새 몇 군데는 구멍이 나 있고, 너덜너덜해져 보기에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빨래를 개다 말고 아내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우리가 무슨 전후 세대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웬만하면 이런 속옷은 입지 말고 버려라. 요즘 홈쇼핑 보니까 싼 것도 많던데……."

영원히 철들지 않을 이 집의 큰 아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아들인 제 말에 아내는 귓등으로 듣습니다.

"보긴 누가 본다고. 놔둬라. 아직 한참 더 입을 수 있다."


순간 책을 읽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아내와의 대화 도중에 박영희 시인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박영희 시인은 제가 살고 있는 대구의 유명한 교도소에서 무려 7년을 복역한 사람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사기 행각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신념이 이끄는 대로 하다 보니 전과 이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일제치하의 광부징용의 역사를 쓰기 위해 월북을 감행했고, 그 대가로 7년이나 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내란음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쩌면 지독한 이념 의식 때문도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 월북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국가보안법은 '잠입탈출'이라는 죄명을 덧씌우게 됩니다. 사나흘 집에 보내 수도 있고, 밖에서 여자와 잠자리도 시켜줄 있으니 전향서 장만 쓰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틴 대가가 바로 7년의 수감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팽이처럼 꼿꼿하게 서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팽이는 서고 싶다』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7년 만에 돌아와 어느새 여덟 살이 되어버린 딸아이와 밥상에서 마주 앉지만 기억에도 없는 아빠를 대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시인은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런 감정은 빨래를 하던 중 문득 유심히 보고만 아내의 브래지어에서 극에 달하게 됩니다.


저의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시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였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금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세상 앞에 당당히 일어서지 못하는 대신에 어쩌면 가슴이라도 세우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너덜너덜 보풀이 일어나고 와이어의 탄성마저 잃어버린 낡은 브래지어, 세상살이의 힘듦을 피죤 두 방울로 달래 보려는 시인의 심정처럼 저 역시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정성껏 빨래를 개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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