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아온 오십여 년 중 사십팔 년은 두려움 속에서 지내온 세월이었습니다. 사십팔 년 동안의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보니, 그건 어쩌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가히 공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두려움 혹은 공포에 떨었을까요? 바로 제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상남자에 속된 말로 이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한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 번 옳다고 한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오가 저희 아버지였다면 아버지는 법정 밖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화형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는 주교나 대주교들이 보는 앞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이 머저리들아!"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모든 일은 아버지를 거쳐서 해결되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머니는 그 어떤 권한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다 못해 어머니께서 콩나물 한 봉지를 사셔도 아버지에게 일일이 허락을 얻어야 하고, 가계부 검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양반이 제 진로에 있어 가만히 팔짱을 끼고 계셨을 리가 없었습니다. 대학교 진학은 물론 심지어 이성교제를 할 때에도 조금은 이른 감이 있었지만, 집에 데리고 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교제가 가능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대학생의 나이면 어엿이 성인인데도, 적어도 20년 가까이 억압된 채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겐 그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를 거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불가능했습니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당연히 저에겐 제 삶이 없었습니다. 제 삶은커녕 제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그런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권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저나 어머니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는 양반이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권위적이고 무섭기는 했어도, 폭력적이거나 완벽히 독재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 칼 같은 각을 자랑하던 아버지가 저 같은 헐렁이가 마음에 드셨을 리는 없었습니다. 왜 그 장면 기억이 나십니까? 배우 이순재 씨가 아들이나 사위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하던 말 말입니다.
"못난 놈!"
거의 평생을 그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똑똑한 아버지도 말이라는 게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는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늘 아버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저를 느끼면서 살아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은 있었어도 제 이름 석 자를 내건 저는 없었던 셈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초라하게 하고, 그것이 심화되면 완전한 소멸에 가깝다는 느낌을 저는 어쩔 수 없이 일찍이 느꼈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오죽했으면 제게는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진학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저 또한 남자이니 예쁘고 근사한 여자와 데이트하고 사귀어 보는 것 또한 저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에게 대차게 대들어 보는 것, 그것이 유일한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두려움에 맞서고 싶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저를 관통해서 저를 휘감고 지나가도록 허락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이든 해보지 못한 것은 두렵거나 무서움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만, 한 번 경험해 본 것에는 나름의 대처 전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 작은 소원조차 이루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극복해야 한다, 사는 동안 반드시 당신이 넘어야 할 산이다,라고 그렇게도 열렬히 아내가 응원했지만, 번번이 아버지라는 고봉준령 앞에서 저는 무릎이 꺾여야 했습니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저는 두려움이 지나가는 길을 뒤쫓지 못했습니다. 정작 매번 두려움이 제 앞까지 왔지만, 그 두려움이 사라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렇게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단 한 번도 목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겐 요즘 말로트라우마가 된 것인지, 간혹 아들이 제게 어떤 고민을 토로할 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맞닥뜨리곤 합니다. 바로 두려움을 떨쳐 내는 방법을 물었을 때입니다.
사실상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근원이나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정서적 반응입니다. 살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철저하게 알고 있다면 두려움 따위가 생길 리는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이런 걸 천우신조라고 하나요? 그래도 명색이 아들 된 입장으로서 감히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하늘이 도와 저는 기어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정정하고 쩌렁쩌렁하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확히 5년 전의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위암 진단을 받으면 수술을 하든 항암 치료를 하든 혹은 그것도 안 되면 집에서 요양을 하다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게 마련인데, 아버지는 말기 위암 진단을 받은 바로 그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상당한 통증이 있으셨을 텐데, 어떻게 자식에게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시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저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쟁반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된 체기가 일시에 사라진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출 수는 없다고 해도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라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도 느꼈고 말입니다.
한평생 저를 사로잡은 두려움이 이제 제겐 없습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끝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었다면 그렇게도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저만 남았을 뿐입니다.
22살이 된 제 아들, 이제는 저를 무서워할 만한 나이는 지났습니다. 게다가 저 역시 성격상 저희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종종 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아야겠다고 말입니다. 인생을 활짝 피워야 할 나이에 저의 고집이나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