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Oct 11. 2023

논란의 소풍

백 번째 글: 선생님들이 진짜 가기 싫은 이유.

어제 오후에 교장실에서 큰소리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도 거의 없고 화도 잘 참는 편인 제가 그래서 주변에서도 많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도중, 교장선생님이 먼저 저에게 딴지를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이유를, 직접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저는 평소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그걸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순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까칠하게 사람을 대하냐고 소리를 질러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마 교장선생님 입장에서도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면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여러 선생님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그러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해 버렸습니다. 감히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교장선생님에게 말입니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초등학교에서는 전제주의 군주나 다름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그런 교장선생님에게 말입니다.


교장선생님은 기어이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내가 왜 까칠해졌는지 말해줄까요? 선생님들이 현장체험학습 때문에 얼마나 나를 애먹였는지 알아요? 또 현장체험학습을 가지 않고 그날 대체 프로그램으로 일정을 운영하겠다는 안이 운영위원회에서 얼마나 어렵게 통과됐는지 알아요?"

역시 관리자는 관리자였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까탈스러워진 교장선생님을 두고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현장체험학습이 무산되는 바람에 단단히 화가 나서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본인의 입으로 실토하고 말았으니 그 예상은 적중하고 만 셈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일선 교사들이 단순히 버스 문제로 현장체험학습을 꺼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은 그게 아닙니다. 게다가 법제처에서 내놓은 해석을 금세 뒤집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2학기 초만 해도 일반 관광버스로 학생을 수송하는 게 위법이라고 하더니, 전국적인 현장체험학습 취소 사태로 인해 노란 버스로 가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더는 현장체험학습을 가지 않겠다는 명분이 사라져 버린 꼴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학교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주로 40대 중반 이상의 선생님들은 그러면 이젠 현장체험학습을 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소위 젊은 선생님들에게는 겨우 그 정도 조치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인솔 과정에서 각종 안전사고가 일어날 시에 돌아오는 학부모의 민사 소송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두고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사서 걱정하느냐고 하지만, 사고가 일어났을 시 담임교사에게 책임 소재를 돌리는 판례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현실이기에 전혀 기우라고 치부할 순 없는 현실입니다.


사정은 그렇다고는 하나 그래도 학부모들에게 이와 같은 이유로 못 간다고 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 노란 버스와 일반 관광버스와의 법제처 해석에 따른 문제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차를 구할 수 없어 못 가게 되었다는 명분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명분일 뿐입니다. 당장 내년부터는 현장체험학습을 거부할 명분 자체가 사라지게 되니까요.


거기에 한몫을 더한 일이 있었습니다. 최근 여러 교육청에서 현장체험학습 시의 각종 민형사상 책임을 전적으로 교육청이 질 테니 선생님들은 안심하고 다녀오라는 공문이 왔었습니다. 역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 게 맞는 모양입니다. 본교의 한 젊은 선생님이 교육청에 질의한 결과 교육청이 말한 전적인 책임의 범위는 버스와 관련한 사고가 일어난 경우에만 한정된다는 답변을 얻어냈습니다. 그 외에 발생하는 사고는 담임교사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담임교사가 안전교육을 철저히 하면 되지 않느냐는 손쉬운 말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정도는 알 것입니다. 학부모의 민사 소송 법정에서 과연 사고에 대한 면책을 받으려면 얼마나 완벽한 지도를 해야 할까요? 털면 먼지가 나는 법입니다. 최근에 한 아이가 담임선생님 몰래 가지고 온 물건을 갖고 놀다가 다른 아이가 실명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정작 법원에서는 아무리 사전 안전 지도를 철두철미하게 했다고 해도, 아이의 그 같은 돌발적인 행동은 충분히 예상해야 했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교사의 지도가 부주의했다고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더 기를 쓰고 못 가겠다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잘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년입니다. 앞으로 몇 달 안 있으면 교육 현장에서 일대 광풍이 휘몰아칠 것이라 예상됩니다. 못 가겠다는 표면적인 명분도 사라졌으니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졸속적인 정책들이 쏟아지게 될지 궁금할 뿐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