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로 지식을 재던 관행이 AI 시대와 충돌하는 지점
"AI가 코딩해 주잖아요. 그런데 왜 견적은 그대로예요?"
요즘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 이런 항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바이브 코딩으로 AI가 코드를 대신 써주는 시대가 됐으니, 인건비가 줄었을 거고, 당연히 개발비도 내려야 한다는 논리다.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논리는 40년 전에 만들어진 자를 꺼내 들고 오늘의 길이를 재는 것과 같다.
1980년대, 한국이 제조업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무형 서비스 시장도 함께 팽창했다. 연구, 개발, 컨설팅에 돈이 오가기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다. 물건은 검수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 설계서나 분석 보고서 등은 어떻게 검수하는가. 품질을 알 수 없으니 가격 근거도 없었다. 부정 계약과 과다 청구가 반복됐다.
기준이 필요했던 정부는 건설업에서 쓰던 방식을 가져왔다. 투입된 노동의 양, 즉 맨먼스(man-month)로 서비스 대가를 산정하는 틀이다. 개념은 단순하다. 사람이 한 달 일하면 1 맨먼스, 열 명이 석 달 일하면 30 맨먼스. 이 수에 단가를 곱하면 견적이 나온다. 이후 숙련도 보정이 추가됐지만 뼈대는 그대로였다. 투입 시간이 가격이 되는 구조다.
이 방식이 한동안은 나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기업 개발자와 중소기업 개발자의 기술 수준 차이는 크지 않았다. 지식은 주로 현장에서 쌓였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일을 했다. 투입 시간이 품질과 대체로 비례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력 수준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인재들은 미국, 유럽, 일본의 최신 지식을 흡수하고 방법론을 바꿨다. 대기업은 내부 교육을 강화하고, 채용 기준을 높이고, 전문화된 조직을 만들었다. 전산화와 자동화가 퍼지면서 신입 채용 규모는 줄었고, 채용되는 신입 직원 수준은 올라갔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이 요구하는 산출물의 품질도 훨씬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무형 서비스의 품질 격차가 눈에 띄게 커졌다. 하지만, 그 품질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 그래서 평가 기준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소비자 대부분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닌 무형의 서비스를 평가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전히 익숙한 기준으로 돌아갔다. 몇 명이 몇 시간 일했는가.
맨먼스 기준도 인력 등급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초급·중급·고급·특급 등으로 나누고, 등급 간 단가 차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많아야 3배에서 5배 수준이다. 현실에서 최고 수준의 개발자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은 신입의 수십 배, 경우에 따라 백 배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제도가 인정하는 격차와 실제 격차 사이에 깊은 구멍이 생긴 것이다.
바이브 코딩은 코드를 생성하는 속도를 바꾸고 단순 구현 작업이 줄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변화는 역설적으로 인력 간 격차를 더 크게 벌린다.
신입 개발자도 AI 도구로 어느 정도 동작하는 코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실제로 써도 되는 것인지, 시스템 전체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소비자가 요구사항을 제시할 때 올바르게 정의됐는지를 판단하는 건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AI가 코드를 빠르게 생성할수록,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소비자의 항의는 이 지점을 거꾸로 읽는다. AI가 개입했으니 노동이 줄었다, 노동이 줄었으니 가격이 내려야 한다. 결과물의 품질을 구분할 수 없으니 투자하는 노동력으로만 평가하는 것이다.
시장은 결국 나뉠 것이다. 낮은 가격을 선택하는 수요도 분명히 있고 모든 프로젝트가 최고 수준의 판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네 식당 중 하나와 지역 맛집, 고급 음식점에서 먹는 음식의 칼로리가 같다고 해서 동일한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다. 사용하는 재료도 노력도 기술도 차이가 큰 결과물을 단순히 칼로리가 같다고 동일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개발 시장도 같은 방향으로 간다. 어느 수준의 결과물을 원하는지에 따라 그에 따르는 비용을 선택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결과물의 차이를 금액으로 보상해 주지 못하면 결과는 하나다. 최고 수준의 기술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시장에서는 최고를 향한 동기가 사라진다. 적당히 잘하는 것으로 수렴한다. 반대로, 결과물의 차이를 가격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방향이 달라진다. 더 높은 결과를 낼수록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작동할 때, 최고를 향한 노력은 계속된다. 그 노력이 쌓여야 시장 전체의 수준도 올라간다. 이 방향이 산업이 한계를 넘어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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