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 돋고 꽃이 핀다. 얼마 전에 계곡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봄과 겨울이 맞닿아 있는 걸 우리는 안다. 봄과 겨울처럼 생과 사는 한 몸과 같이 맞닿아 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일을 하는 중에는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인다. 그런 정신없는 시간들을 지나고 나면 지는 해와 함께 귀가를 한다. 마치 하루가 한 생의 축소판처럼 여겨진다. 오십 중반, 무엇이 보이는가?
사람이면 보험도 들고 연금도 들고 본인들의 노후를 위해 엄청 많이 신경을 쓰면서 산다. 무슨 배짱인지 나는 한 번도 노후를 걱정하거나 준비하지 않았다. 나만 그러느냐 그 방면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이 내 남편이다. 내 남편은 신앙처럼 교주처럼 생각하는 부모님이 1번이겠지만 나의 1번은 자식이다. 어떤면으로든 자식들을 위해 나는 기꺼이 밀알이 되겠노라가 나의 삶의 방향이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퍼주거나 허용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종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소양을 기르는데 제대로 역할을 하고 싶은 게 나의 생각이다.
자식을 위하는 길 중에 한 가지가 때가 되면 놓아주는 것이 또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캥거루족이 되길 원치 않는다. 스스로 땅을 씩씩하게 뛰어다니길 원한다. 자식을 독립된 사람이 되도록 놓아주는 시간들을 보내다 보면 서서히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를 보는 건 그야말로 찰나다. 눈을 똑바로 뜨면 노령의 부모님이 보인다. 전화벨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노쇄한 모습에 애처롭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이 미래의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막을 수 없는 세월을 어떻게 이겨낼까를 생각한다.
준비 없는 노후는 나에 대해 초연한 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일이다. 뭘 그렇게 본인을 챙기느냐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어느 때가 되면 사실 정정당당하게 본인을 챙길 필요도 있다. 생각이 있는 성인이 되고부터 매번 본인보다 주변을 걱정하고 챙기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자식이 독립할 때가 되면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본인을 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굴뚝같아도 늘 본인에게 인색했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식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후를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움직인다.
첫 번째로 챙길 건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적게라도 받기보다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죽는 그날까지.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기본은 갖추고 있어야 사람도리도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자식은 또 그 자식을 부양해야 되는데 부모까지 부양하도록 하는 건 좀 가혹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부모로서 최소한의 쌀독은 채워놓고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무엇이든 꾸준하게 할 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 육신의 쌀독만 채우면 능사가 아니다. 정신적 정서적 쌀독도 제대로 채워야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젊을수록 시간이 더디 가고 늙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건 같은 시간에 하는 일의 양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간혹 늙어서도 많은 일을 하거나 바쁜 시간을 보낼 경우 '하루가 너무 길었다.'이렇게 느끼곤 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면서 사는 건 세월을 붙잡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한다.
굳이 세 번째라고 이름 붙이기도 모호한 괘변 같은 생각을 쏟아내어 본다. 스스로의 마음을 무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외로움'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필요하며 그 외로움을 신체의 일부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목숨은 어느 순간에 끊어지는 것 같지만 우리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간다. 세포가 하나 둘 역할을 멈추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죽어가는 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이 곤궁해지면 마음도 점점 황폐해질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빈자리를 외로움이 점령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거인이 될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나만 겪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금이나 보험보다 더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국어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책도 읽게 되고 제법 살만해지면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는 노후까지 읽어내야 한다. 내 나이도 잘 모르게 되는 나이가 되면 내 나이는 그냥 두고 마음먹고 주변인들의 나이를 헤아려보며 깜짝 놀라곤 한다. 나이만 나이를 먹은 게 아니다. 사실 몸도 나이를 먹어서 놀라면서 태연한 척한다. 순리를 받아들이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바라는 자기를 완성해갈 필요가 있다. 멋지게 붉은 노을을 그리는 화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