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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Sep 10. 2023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회사 독서 동호회에 가입했다. 막내 주니어 사원이 자신의 동기들을 중심으로 사내 동호회를 조직하는데 한 달에 책을 무려 3만 원씩 살 수 있다며 자랑을 했다. 조직문화의 일환으로 회사에서 동호회를 만들면 인당 3만 원씩 회사에서 지원을 해주는 건 나도 주니어 때 당시 팀장님을 따라서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던 적이 있던지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사는데 그 비용을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젊은 친구들이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를 냈다고 생각했다.


‘나도 가입할래’ 제안했고 흔쾌히 허락을 얻었다. 며칠 뒤에 단톡방이 개설되고 서로 인사를 하고 희망하는 책을 말하면 일괄 구매 후 회사 제출용 사진을 찍고 나눠준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금액에 맞춰 생각하고 있었던 책을 얼른 신청했다.


1.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편

2.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황선우,김혼비)


독서는 주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하는데 편도로 40분을 다니기 때문에 책 읽는 시간은 넉넉한 편이다. 처음에는 자기 계발서 위주로 읽기 시작했다. 평소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어서 영감을 많이 받았는데, 예를 들면 우리 뇌는 원래가 게으르고 변화를 싫어한다거나, 습관이 일하게 하기 위해서 아주 작은 루틴부터 만들어야 한다거나, 새벽에 일어나면 미라클을 만들 수 있다거나, 자꾸 생각하면 끌어당겨져서 온다거나, 부자는 그릇이 남다르다거나, SAY NO라고 외치고 가르침을 받으라거나,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거나, 정속 주행하지 말고 추월해서 가라거나, 도구가 있어야 한다거나, 개인이 브랜드라거나, 질 좋은 싱킹을 해야 한다거나 뭐 하여튼 많이 읽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내가 쓴 글을 보면,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사실 아직까지 그 버릇을 못 고치긴 했다)가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책만 읽고 있었으니까(인풋) 나오는 글도 다 그런 투(아웃풋)였다. 그래서 이제는 순도 100% 에세이를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크레마 북클럽에서 검색하던 중에 김혼비 작가를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읽은 것이 운 좋게 ‘다정 소감’이었다. 진짜 빵빵 웃음이 터졌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웃는 사람은 멋있어 보여서 아예 대놓고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잠깐만, 이 부분 조금만 이야기하고 지나고 싶은데 아침 출근길 지하철 풍경은 언제나 심심하다. 잠이 덜 깬 얼굴이거나 무표정이거나 옆이나 뒷사람을 흘기며 짜증을 내거나 게임이나 영상에 집중하고 있거나 하여간 전체적으로 다들 오래 묵은 신문지같이 건조하고 퍼석하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웃는 사람은 폐휴지 재활용 터에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 꽃같이 생기가 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 채 누군가 ‘좌우로 나란히’를 외친 것처럼 갑자기 입술 끝 꼬리가 옆으로 쫙 펴지고 동시에 눈꼬리도 ‘지금이야’ 하며 무지개 모양을 팍 낸다. 그렇게 웃는다.


그 정도로 너무 재밌게 읽었다. 낄낄대며 읽다가 묵직하게 집중하게 만들기도 하고 모기 물린 데 침 바르듯이 살짝 여운을 주고 금방 사라지기도 한 작가의 글 솜씨 덕분에 ‘다정 소감’은 정말 순식간이 읽었던 것 같다. 더 필요했다. 그래서 김혼비 작가의 책은 시중에 나온 것은 다 읽었다. 여자 축구 이야기, 축제 간 이야기, 술 마신 이야기, 당신이 첫 문장이던 이야기, 요즘 먹고사는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나온 책이 있다고 해서 사야지 하던 찰나에 회사 독서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책을 가장 먼저 신청을 했다.


그리고 나는 1주일간 여름휴가를 떠났다.


휴가 기간에도 동호회 단톡방에는 활발히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주문한 책을 수령했다는 둥, 수령하러 몇 층으로 오라는 둥, 은하수 히치하이커는 좀 늦게 올 거라는 둥 회원들의 단톡방 메시지와 함께 책을 수령한 회원들의 인증샷도 구경하면서 휴가 끝나고 회사에 돌아가면 내 책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우리 팀 막내가 당연히 자기 책 수령하면서 내 책도 가지고 오겠구나. 내 책상 위에 올려놓겠구나. 은하수 히치하이커는 다음 주에 내가 직접 받으면 되겠구나. 그런데 잠깐만,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가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다고? 그것도 앞으로 일주일씩이나? 오 마이갓.


평소에도 내 책상은 극강의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기에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으나 휴가 기간에는 더욱 비워서(키보드까지 들고 와버렸다) 무슨 설치 미술하는 사람처럼 외계 생물체 뼈대 같은 노트북 거치대만 덩그러니 둔 채로 왔는데, 그 순백색 하얀 도화지같이 넓고 깨끗한 내 책상에 책이 한 권 놓여 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보통 팀장 자리에 어울릴 법한 책이 있다. 최고의 조직이라거나, 강력한 리더십이거나, 인플레이션이나 세계 경제가 정말 긴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추정되는 제목의 책들이 어울린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니.


’이제 이해가 되네. 그래서 평소에 최선을 다 안 하는 거였구나. 죽을까 봐‘라는 농담이 벌써 귓가를 맴돌았다. 안돼. 특히 내 자리는 상무님 방과도 가깝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책이 보이면 평소에 책을 많이 있든 안 읽든지 간에 한번 슬쩍 들어서 책 제목을 살피고 ‘음 이 책 알지 좋지‘와 같은 리액션을 보이기 마련이다. 책 표지도 출판사에서 노출도를 염두에 둔 탓에 약간 형광기가 있는 밝은 파랑으로 아주 잘 뽑아놔서 책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가능성은 거의 100%에 가까워 보였다.


’저는 책을 제목만 보고 사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게 하필 제목이 그런 거예요. 아마 출판사에서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아야 잘 팔리니까 그렇게 한 거 같은데, 사실 에세이는 제목이랑 내용이 별로 상관없는 경우가 많아요’라는 변명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혹시 막내가 내 책상에 올려놓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가 들고 있다가 생색내면서 나에게 가져다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휴가 복귀전에 따로 연락을 해서 ‘혹시라도 내 책 오면 들고 있다가 나 줘. 책상에 올려놓을 필요 없이, 땡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했다. 깨끗한 내 책상 위에 파란색 책이 올려져 있었다. 그래 고맙다 막내. 옆에 직원이 내가 없는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 무슨 일은 항상 있지. 책을 들고 막내를 쳐다봤다. 네 맞습니다 그거 제가 올려놨습니다 하는 것 같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본다. 고마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래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아닌게 어딘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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