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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25. 2022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내 리더십 교육 마지막 시간에 캘리그래피를 배워보는 시간이 있었다. 리더십 교육을 실컷 받았으니, 리더로서 다짐을 캘리그래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보다 골치 아픈 문제는 문장을 만드는 일인데, 고민 끝에 ‘최고가 되어 떠나라’로 정했다. 직접 창작한 문구는 아니고 '배달의민족' 사무실 벽에 붙어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베낀 것이다(캘리그래피에는 어울리지 않는 ‘주먹’ 일러스트도 추가해서,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회사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진실한 메세지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옆에 분들은 마치 누군가 “당신 직장인 맞아?”라며 의심이라도 하는 듯이, ‘실천하는 리더가 되자’, ‘생각하는 리더가 되자’, ‘오늘도 수고했다’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너도 열심히 해서 팀장 되고, 상무 되고, 대표이사까지 노려라. 그러다 50대 후반 정년에 되어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을 꿈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보자!”고 내가 이야기하면 후배들이 믿을까? 아니 그전에, 모두가 리더가 되어야 하나? 아니라고 본다. 각자 고유한 특성이 있고 가지고 있는 무기들이 다른데, 모두가 왜 전부 리더가 되고, 관리자가 되어야 하나. 그래서 나는 팀원들에게 개인적인 발전이나, 쓸모 있는 기술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 편이다. '여기서 충분히 배워서 최고가 되고, 그다음 스텝(회사 안이나, 혹은 밖)으로 이동하라'. 이것은 물론 옳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20대 후배와 대화 중에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나만 추천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본인이 좋아할만 한 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음악도 만든다고 하도 떠들어 대니, 뭔가 소재가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재밌는 거 하나만 알려달라’는 취지로 해석했다(아니면 그냥 말을 이어가고 싶어서,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주제로 아무거나 던진 질문 일 수도). 어쨌든, 피드백은 있어야 하기에 “개인의 선호를 내가 추천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하며 일단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면 은근히 주변에(직장인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어찌보면 정말 어려운 주제이긴 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현재 우리나라 교육 커리큘럼 안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이 명제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해야만 풀 수 있는 것인데, 여기 엘리트들은 그런 딴짓쟁이들은 분명히 아닐 것이고, 하라는 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들을 모아놓은 집단인 지라.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그러게 뭐가 있을까 거참” 하며 자연스럽게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사실 타인의 선호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내 것만 생각하기도 정신이 없는데, 남이 뭘 좋아하면 좋을까,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를 왜 고민하겠는가. 일단 풀어야 할 수학 문제 정도로 머릿속에 넣어 놓고, 답이 나오면 후배와 다시 이야기를 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넘겼다. 다음 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길 이동 중에 동기부여 콘텐츠를 듣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화면은 안 보고 귀로만 듣기 때문에 누군지는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지요. 그러는 중에 ‘아 내가 이런 걸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느끼게 됩니다”라는 멘트를 했는데, 아 이거다 싶었다.


“형은 사업 안 해? 돈 벌려면 사업을 해야지”


“그러게 좋은 아이템이 안 떠오르네, 아이템 좋은 것만 있으면 내가 당장 이 회사 때려 치운다”


‘좋은 아이템이 없어서’라는 말. 직장인 사골 멘트 5위안에 들어갈 법하게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답을 찾았다. ‘좋은 아이템’이라는 것은 ‘팔아봐야’ 나온다는 거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그분’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쑤시개를 팔아보고, 안되네 말아먹고, 다른 사람은 뭘 파나 관찰하고, 같은 것을 팔아보고, 또 말아먹고, 왜 안 되나 공부하고, 이번에는 선풍기를 팔아보고, 시계를 팔아보고. 이런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 ‘좋은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현장에 뛰어 들어서 집중하고, 고민하고, 공부해야 겨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인데, 회사 흡연실에 앉아서 믹스커피와 궐련 담배를 들고 아이템 타령해 봤자, 손가락으로 담배 불똥 튕길 때 사라져 버릴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후배에게 아이스 초코를 권하며 “어제 얘기한 거 있잖아, 뭘 좋아하는지 찾는 거. 오늘 아침에 어떤 영상에 들었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 하면서 이야기를 해줬다. 요즘 사적인 모임 만들어주는 어플도 많이 있고, 새로운 영역의 사람들도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재밌는 경험이나 기술 같은 걸 배우는 것도 해보면 좋지 않을까라며. 얼마나 좋니, 젊은 사람들은 시간이 많잖니,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 신나게 얘기해 줬다. 실제로 하고 말고는 그 친구가 알아서 하는 거고, 나는 일단 물어본 걸 대답해 줬으니 내 할 일은 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과거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선배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들리느냐? 안 들린다. 그리고 나중에 본인이 필요할 때가 오면 알아서 고민하고, 찾아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은 살짝 영감 정도만 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 후배가 ‘보드게임’ 동호회에 가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좋네, 재밌겠다”라고 해줬는데 그렇게 하나씩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회사 사람들, 직장인 말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많이 교류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면 일단 ‘혹하는 것’을 체험해 봐야 한다. 나라는 세계와 다른 세계 두 가지가 만나서 서로 충돌하게 되면 ‘다양한 변수’의 조각들이 발생하는데, 그것들 중에 내가 찾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변수를 타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은 몸을 맡겨보는 것이 좋다.


필요한 건 약간의 용기와 ‘에라 모르겠다‘하는 식의 추진력 정도?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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