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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Nov 06. 2022

주변 사람들 신경 쓰느라 나에게 제일 소홀히 했네

“진짜 안 올 거야?”


“응, 이번에는 빠질게 미안해”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캠핑을 취소했다. 다른 일정들이 겹쳐서 도저히 소화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다. 고향 친구들은 섭섭하다고 난리였고 나는 수차례 사과했다.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분기 결산을 해야 하고 대표이사 보고를 빠듯하게 준비해야 한다. 부모님께서 다음 주 우리 집에 방문하기로 했고 주말에는 후배 결혼식이 있다. 돌아오는 연휴에 가족여행을 가기 위해 숙소를 예약해야 하고 아이들은 밖으로 포켓몬스터를 잡으러 가자며 지금 내 방문을 수시로 두들기고 있다. 


왜 이렇게 정신없고 바쁠까. 맡고 있는 역할이 많아서 그렇다. 아빠, 아들, 남편, 직원, 친구, 선배, 모임 구성원 등등 뭐가 많아도 너무 많다. 나는 하나인데 역할은 수십 가지나 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여기에 진정 나를 위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나를 위한 것.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즐거움. 


없는 것은 아니지. 술을 마신다. 취해가는 동안 나는 온통 내 이름으로 도배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기는 내 감정이 가장 중요하며 오직 내 생각과 이야기를 신나게 배설할 수 있다. 이곳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에 2차, 3차, 노래방을 외치며 발버둥 치지만 곧 나는 잠들고, 아침에 허무와 후회를 구역질하며 주변에 널브러진 ‘역할’을 다시 하나씩 몸에 부착한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닥친 미션부터 차례로 처리하며 그렇게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금방 주말이고, 벌써 연말이고, 순식간에 수년이 흘러가 버린다. 


“시간 진짜 빠르네” 신기해하며 다시 술잔을 채운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방식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의 연속이었다.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공식을 외우고, 대학을 가고 군대를 나왔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혹시 누군가 나에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다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고 답변할 것 같다(나만 그런 거야?).


그래, 나는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항상 결정을 했고 내가 스스로 선택지를 만든 적이 없었다. 


이제라도 만들어야겠다. 선택지 마지막에 ‘기타 등등’이라는 항목을 넣고 내가 직접 원하는 바를 적어 넣고자 한다. 다만, 갑자기 현재 내 역할을 모두 버리거나 포기할 수는 없는 법. 하나씩 정리를 하며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쨌든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냥 그때그때 수습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일단 목적을 가져 보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지저분한 방을 어떻게 정리할지 모른다고. 그냥 다 버리고 새로운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역을 정하고, 하나씩 순서대로 버릴 건 버리고, 치울 건 치우면서 방 정리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목적은 단 하나. 오직 나를 위한 삶이다. 타인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시간과 즐거움을 위해서.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고 실행을 할 수 있는 세계로 바꾸기 위해, 나는 내 룸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 이념이나 비전은 그렇게 정했다. 다 잘하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하고 나머지는 그냥 흘러가도록 둬야겠다. 거절할 것은 과감히 거절하고, 설득이 필요하면 꾸준히 여러 번 설명해서 이해시키리라. 그러다 보면 점점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늘어가겠지. 


‘나에게 몰입하는 삶’ 나는 그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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