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글 쓰기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
— 유식 삼성설로 풀어본 일상의 오해
우리는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다”는 말을 흔히 쓴다. 불교, 특히 유식사상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불교 문화가 우리 생활의 언어와 사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유식사상은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과 현실감은 마음(식)의 작용으로 구성된다는 가르침이다. 유식에서는 이 마음의 작용을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이를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 부른다. 용어가 다소 생소하니, 일상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느 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간단히 파스타나 해서 차릴까?”
가까이 지낸 몇 분을 초대해 저녁대접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며느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상한다. 남편에게 투정을 늘어놓는다.
“그냥 음식점에 가서 대접하면 좀 좋아?”
“파스타 하기가 그렇게 쉽나?”
“또 ‘간단히’가 뭐야? 고생할 사람 김 빠지게!”
생각할수록 서운하다. ‘자기 딸이라면 이렇게 부려먹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든다. 파스타를 하려면 평소 쓰지 않던 재료를 사야 하고, 그릇도 닦아야 하며, 와인도 준비해야 한다. 여섯 명 분량의 파스타를 알맞게 삶는 일도 만만치 않다. 손님을 맞이하려면 집안 청소도 해야 한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큰 일을 시키면서 ‘간단히’라니,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뿐이다.
한편, 시어머니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 며느리가 선뜻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서운하다. 예전에 외출했다가 때를 놓쳐 아들 집에 들렀을 때, 며느리가 파스타를 만들어 준 적이 있다. 국수를 삶아 소스를 얹어 내는 모습이 간단해 보였고, 무엇보다 맛이 좋았다.
“우리 며느리는 솜씨도 좋고, 살림도 참 야무지다.”
시어머니는 속으로 감탄했다. 음식점에 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손님들에게 며느리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제 이 이야기를 유식사상의 언어로 다시 보자.
먼저 변계소집성이란,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다고 지어내어 붙잡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앞선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자기 딸이라면 이렇게 부려먹지 않을 텐데’라고 지레짐작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남편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으니, 시어머니에게 ‘자기 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며느리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또한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를 고생시킬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음식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며느리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그 말을 ‘나를 부려먹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변계소집성이다. 조건 따라 일어난 상황 위에, 마음이 하나의 의미를 덧붙여 실체처럼 붙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의타기성은 무엇인가. 의타기성은 이 모든 일이 조건에 의존해 일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다. 시어머니의 말, 며느리의 경험과 기억, 과거의 관계, 그날의 상황과 감정이 서로 얽혀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본래 옳고 그름도, 악의도 선의도 없다. 다만 조건들이 그렇게 만났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원성실성은 이 의타기적인 상황을, 변계소집 없이 그대로 보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이 ‘나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붙이지 않고, ‘내가 억울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한 말을 했고, 그 말이 어떤 조건 속에서 이렇게 들렸다는 사실을 그대로 본다. 이때 세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덧붙이던 생각이 멈추면서, 상황이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원성실성을 체험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특별한 깨달음의 장면이 아니라, 마음이 더 이상 이야기를 보태지 않는 순간이다. 시어머니의 말이 ‘나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무심함’도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아차릴 때, 상황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긴장만 풀린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해석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그때 세계는 갑자기 조용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두터운 벽도 자연스럽게 얇아진다. 유식이 말하는 원성실성이란, 바로 이렇게 현실이 마음의 왜곡 없이 드러나는 소박한 순간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