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오시이 마모루, 1995)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영화 중 하나이자 사이버펑크의 고전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 대한 비평은 이미 양과 질 모두 충분하다. 그런 만큼 여기서는 본 극의 몇몇 주목할만한 키워드만을 짧게 다루고자 한다.
본 작에서 가장 가시적인 키워드는 망명이다. 본 극은 한 프로그래머의 (아마도 미국) 망명을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가 좌절시키는 것으로 시작해, 어느 식민지 출신 독재자의 망명 신청이 숨겨진 핵심 사건을 포착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고, 인형사의 망명 시도로 주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다. (정치적) 망명은 보통 거대기업이 이미 지배질서를 완전히 구축하여 상대적으로 국가의 영역이 잘 드러나지 않는 여타 '미국식' 사이버펑크 작품들과 공각기동대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영화판에서도 사이사이 드러나지만, 이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망명이라는 키워드를 이어받는 것이 바로 난민이다. 난민과 망명자는 모국이나 고향에 기반한 정체성을 의식하게 하는 타자라는 점에서, 생물학적 신체로부터는 떠나왔으나 아직 의체나 전뇌라는 물질적 기반을 버리지 못한 고스트(개별정신)의 비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기억이란 닻에 발이 묶여있는 공각기동대 세계 전체의 지지부진함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혼란을 그저 사회적 아노미나 일탈로 묘사하고 마는 많은 흔한 작품들에 비해, 공각기동대가 설득력과 깊이를 갖는 근거가 된다.
본작의 도시 풍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홍콩의 까울룽자이씽(구룡채성)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주인공이 소속된 집단인 공안 9과가 활동하는 국가가 일본임을 굳이 숨기지 않으면서도 오직 풍광만큼은 홍콩의 것을 가져다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첫째, 기존 사이버펑크 장르에 대한 패러디로서 의미가 있다. 많은 유명 SF 작품들이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넓혀가고 있던 일본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내재하였으며, 특히 도시 풍경의 (서구적) 일본화는 사이버펑크의 클리쉐가 되었을 정도다. 아예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또 다른 아시아 지역의 풍경을 끌어오는 것은 이런 기존 장르의 관습에 대한 성공적인 패러디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이를 통해 일본, 더 넘어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사이버펑크 장르 안에 깊이 배어있음을 성공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둘째, 네트워크의 물리적 형상으로서 홍콩의 풍광이 적합하였다. 본 작품에서 네트워크는 시뮬레이팅 된 도로망, 뇌 조영 영상, 그리고 도시 풍경으로 시각화된다. 윌리엄 깁슨의 기념비적 소설 "뉴로맨서"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이 사이버스페이스와 네트워크를 묘사하지만, 많은 경우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추상적이었다. 개별자들이 고도로 복잡하게 얽혀 신호(정보)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의도지 않은 "버그"를 일으키기도 하는 네트워크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데 구룡채성의 무절제한 풍경이 더없이 적합했으리라.
셋째, 예쁘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초반에서 중반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전환부에 주인공이 거리를 거니는 장면을 오랫동안 담아낸 것은, 물론 다른 정보와 부딪침으로써 자아의 존재를 어렴풋이 가늠하는 인간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 작품이 구현하고자 한 영상미의 핵심이기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흔한 상징으로서 거울과 물(수면)이 특히 중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많은 작품에서 거울과 수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성찰과 자기애를 의미했다. 다만 본 극에서 양자는 이런 의미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조금은 다르다. 우선 거울은 나와 거울 속의 상이 서로를 흐릿하게 마주 보게 하는 장막으로, 투명한 접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면서 또 다른 나 자신과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매개이자 나와 남이라는 양방향의 환상을 생산하는 스크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거울은 언어이자 영화이다.
반면 수면은 거기서 한 발 더 넘어가 나와 수면에 비친 나의 상이 하나로 융합하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핵심 계기이자 탄생의 상징이다. 더 정확히는 주인공이 물 밖에 있는 상태에서 수면에 비친 그림자는 전통적인 상징의 기능을 하나, 물속에 들어갔을 때 비친 자기의 상은 융합을 상징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의 의체는 생산되어 물 위로 서서히 떠오르며 이는 또 다른 출산으로서 양수 속 태아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바다에 잠수했던 주인공이 서서히 떠올라 수면에 비친 자기의 상과 맞닥뜨리는 장면은, 결국 주인공이 (또 다른) 나와 융합하여 보다 "완전"해질 것이라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본 극에서 등장하는 신체 투명화 기술인 광학미채는 거울과 물과 달리 자기의 상을 지우는 기능을 하고, 이는 네트워크에 녹아드는 개인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지적은 분명 타당하다. 다만 광학미채를 썼을 때도 오랫동안 신체의 윤곽을 따라 풍경이 일렁이듯 일그러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개별정신-고스트라는 네트워크의 결절점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영사하여 우리가 네트워크 자체가 아닌 네트워크의 상을 보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공각기동대 시리즈 내내 순정남 바토는 주인공 모토코를 사랑하고, 총을 든 공주님 모토코는 항상 나쁜 남자인 반동 인물에 매혹된다. 본작에서는 인형사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는 웃는 남자나 쿠제 히데오가 여기 해당한다. 공각기동대는 이렇듯 로맨스 장르의 오랜 흥행 문법을 충실하게 반복하는데, 본 극에서는 바토가 주인공 모토코와 인형사가 융합하는 장면까지 직접 봐야 했다는 점에서 그 비극성이 더하다. 소위 말하는 NTR이다.
엔딩 작면에서 바토는 모토코에게 그래서 지금 네 안에 그 녀석이 있냐고 묻는다. 어떻게 들어도 중의적이다. 새롭게 태어나 아이의 의체를 가진 모토코는 이미 융합을 끝낸 자기는 아이일 때의 나가 아니며, 지금 자신은 더 이상 모토코도 인형사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바토는 떠나려는 모토코를 그냥 보내준다. 물은 붙잡으려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다.
바토가 의연할 수 있는 것은 바토가 여전히 의체를 신체로, 신체를 존재로 바라보는 과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토코가 광학미채를 쓰고 나서 나신이 됐을 때마다 굳이 자신의 코트를 덮어준다. 이는 그가 의체를 여전히 생물학적 신체로 인식하며, 그 신체는 개인의 명예 혹은 자아상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가 "자신의 취향은 아닌" 의체에 모토코를 집어넣어 되살려내는 엔딩은 그럼에도 그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모토코의 의체가 아닌 고스트임을 보여주는데, 고스트에 바로 다이브 할 수 있음에도 껍데기를 굳이 거쳐야만 사랑할 수 있는, 어쩌면 일부러 다이브를 하지 않는 바토의 모순이야말로 인간적인 것 아닐까.
주인공 모토코는 깊은 바닷속에서 온갖 절망 및 불안을 만나지만, 단 한 줄기 희망의 가닥을 붙잡는다. 그것은 환골탈태의 가능성이다. 본 극에서 모토코는 인형사와 융합함으로써 변화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변화가 낯선 나-네트워크와의 융합을 통해 가능하다면 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 중 하나는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습관 혹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흔한 대답이 아니다.
모토코는 융합 전까지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고, 이를 가늠케 하는 대사가 신입 요원인 토구사의 왜 자신을 뽑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주인공의 응답이다. 모토코는 고도로 분화되고 발전된 체계는 결국 비슷비슷한 단일종으로 동일화되어 죽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다양성 확보를 위해 최신 경향에 한참 뒤처진 토구사를 뽑았다고 답한다. 이는 인형사가 모토코와 융합하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유와 사실상 동일하다.
동일자의 공포, 내가 독자적인 나가 아닌 다른 이와 똑같은 무언가일 수 있다는 두려움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도 잘 묘사하고 있다. 굳이 이 작품을 예시로 드는 이유는, 해당 작품의 막바지에 환골탈태에 대한 길고 직설적인 논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각기동대와 드래곤 라자의 주제 전개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해당 작중의 어떤 숲에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의심할 때마다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가 내 기억의 일부를 가져가 복제되는데, 이렇게 복제된 자아들은 서로를 극렬히 증오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자기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제된 자기를 하나만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지만, 그 대가로 죽은 자아가 가지고 간 만큼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게 성찰적이고 윤리적인 모토코가 공안 9과에서 프로페셔널한 킬러로 활동하는 것은, 자신과 잘 구분되지 않는 다른 의체에 대한 존재론적 분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지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주는 실마리를 따라 공각기동대의 논리를 정리해보자면 변화의 동인은 정서적으로는 머물러있는 나는 타자와 같은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이고, 기능적으로는 다양성 확보를 통한 재난 상황에서의 생존이다. 반면 이를 가로막는 것은 정서적으로는 자아/기억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며, 기능적으로는 고도화/전문화의 필요성이다. 과도할 만큼 전문적 능력을 지닌, 이미 충분히 자아를 잃은 모토코와 인형사만이 융합에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