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아지 유산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유산 싸움 중이다

by 명랑한김작가


그녀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자부심, 실로 막대한 유산이다.

서로 누가 많이 갖었네를 다투게 되는 형체가 없는 보물.

누군가를 콕 집어서 넘겨주지는 않은 규모를 알 수 없는 정신적 산물로 재산 다툼이 생긴다면 웃긴가.

물질도 정신도 바닥까지 털린 상태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을 수 있는 힘은 그녀의 굽을 대로 굽은 허리 덕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자태는 기억자였다.

기억자로 태어났을 것만 같은 반듯하고 힘 있는 기억자.

여느 노인들과는 다른 느낌의 구부러짐.

지팡이를 짚은 적도 없고 유모차를 끌고 다닌 적도 없는 어쩌면 손에 일을 놓을 수 없던 그녀는 지팡이조차 짚을 시간도 없었나 보다.

풍족하진 못했던 가정형편에도 풍요롭게 기억되는 우리 집 밥상은 굽은 허리로 시장에서 시래기를 주워 만든 반찬조차도 화려하게 변신시킨 그녀의 고품격 요리 정신 덕이리라.

증조할아버지께서 광산을 운영하셔서 큰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탓에 살림에 능하셨다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요리 영역이었다.

생일이면 등장하는 마카로니간소메샐러드가 그렇다.

미군부대가 있는 군산에서 아빠가 양복점을 하셔서 미제를 많이 접하고 살았다.

큰집 며느리, 전쟁, 미군부대, 공주댁, 만주댁...

내가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삶은 무척 고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더 꼿꼿이 마음을 세우신 할머니.


그녀는 우리 할머니, 나의 증조할머니 문아지 여사님이시다.

아빠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어머니, 증조할아버지의 아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으신 분이었다는 걸.

증조할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시게 되면서 유모에게 아들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셨다.

그렇게 친할아버지와 아빠, 우리 세대까지 묵묵히 사랑으로 키워내셨다.

전쟁통에 아들인 할아버지를 잃으시고 손주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거셨다. 총알이 날아다닐 때는 맨 아래 우리 아빠인 손주를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동생들, 그 위에 며느리인 친할머니를, 맨 위에 할머니가 감싸 안고는 이불을 씌우고 대피했다고 한다.

남북전쟁 이후 아들을 잃은 할머니께서는 혼자되신 친할머니를 재혼시키고 삼 남매를 키우셨다.

그리하여 큰아들의 자손인 우리는 할머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자손들은 모두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아빠, 손주며느리인 엄마, 고모, 삼촌 그리고 우리 사 남매까지.

심지어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말이다.

특히 고모는 항상 '우리 할머니'라는 호칭을 강조하신다.

할머니의 슬하에 있던 모두가 유산을 받은 셈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유산 싸움 중이다.


서로 누구를 더 사랑했네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기도 한다.

문아지 정치의 특별한 노하우를 분석해보자면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기본적으로 장착하신 인품에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사랑은 위로조차 품위 있었으니까.

상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며 해주셨던 한마디 '몸 상한다'

그리고 내어 오시는 음식은 보약이 되었었지.

자매간의 다툼에도 각각의 입장에서 타일러 주셔서 할머니는 모두 내편이라고 생각하게 하셨다.

누구의 편도 아닌 내편.

우리 할머니는 손주며느리인 엄마를 끔찍이 우대하셨다. 아빠의 일을 돕고 계셨던 엄마를 밖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이니 남자나 매 한가지라시며 김밥은 꽁지를 떼고 가운데 토막만 주셨으며 맛있는 음식은 엄마 몫을 따로 두셨다. 손주를 보시고 싶어 하시는 마음에 한 번만 더 속자며 넷째를 낳게 부축이신 아들 선호 사상이 없으셨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시대의 다름이라고 여겨진다.


누구에게나 할머니는 있을 것이고 누구에게나 자기 할머니는 특별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더 특별하다.

그래서 문아지 유산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나누어 가져도 줄지 않는 유산을 남겨 주셨으니.

잊지 않기 위해, 나를 통해 아들에게 남겨지게 되는 문아지 유산을 기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