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가영 Jul 28. 2024

<언제나 책봄> 김기태의 '롤링 선더 러브'

시간의 흐름... 우리의 변화

b의 눈에선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뭐가 그리 신났어? 재밌어? 일반인들 나와서 공개 연애하는 거 아냐?" 티브이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b의 모습에 괜스레 심통이 났다.

"자기도 와서 한 번 봐봐 이거 골 때린다니까."

젊은 남녀가 펜션에서 며칠을 함께 생활하며 커플을 선택하는 과정을 담은 모 방송사의 리얼리티 공개 연애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신랑이 보고 있다.

'저 사람 연애가 하고 싶은 걸까? 왜 남들 연애사를 보며 저리도 행복한 표정이야?'

실명이 아닌 영숙과 영호란 가명을 쓰는 두 남녀를 보며 마치 자기가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수줍어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영 꼴 보기가 싫어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남녀가 처음 만나 호감을 갖고 사랑이란 감정이 싹트기까지 변화를 허구가 아닌 리얼로 볼 수 있다는 점, 연예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러브스토리가 온 국민에게 공개되는 상황이 신선할 법도 하지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애사가 포털 메인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건가?라고 치부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주말 저녁 거실에 나와 혼자 티브이에 쏙 빠져 버린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럴 땐 고백을 해야지. 참나 답답하네 답답해" 입을 오물거리며 14살 아들이 <나는 솔로>를 보고 있다. 커플의 대화를 보며 좋아하는 포인트나 꼭 자기가 썸이라도 타는 것처럼 설레하는 모습이 지 아빠랑 붕어빵이다... 얼마 전 보았던 b의 미니미가 히죽거리며 소파에 앉아있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었는데 공개 연애프로그램을 보며 좋아하는 아들을 보고 사실 적잖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앉아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티브이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유치하다고 여겨왔던 영호와 영숙의 대화에 점점 빠져들어간다. 그들을 보며 b와 연애했던 그 시절까지 소환돼 잠시 추억에 젖기도 했다.


이틀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용평에 왔다. 하얀 눈 대신 초록으로 뒤덮인 스키장에서 여름을 즐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새롭고 설렌다. 리프트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가 루지를 타고 내려온다. 헬멧을 쓰고 1400여 m의 긴 트랙을 질주하는 짜릿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다.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 12살 14살 아이들이나 일흔이 넘은 아빠, 이제 곧 70을 바라보는 엄마, 마흔 중반이 된 우리 부부 모두 광활한 자연 속에서 스피드를 즐겼다. 부모님은 케이블카를 타고 발왕산의 천년 주목숲길을 걸었고, 두 아이와 우리 부부는 리조트 안에 있는 워터파크에서 반나절 이상을 보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라 자기주장이 강해지다 보니 대가족의 여행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하루종일 물속에서 첨벙거리던 아이들은 숙소에서 간단히 라면을 먹자 하고, 강원도까지 와서 라면은 무슨 라면이냐 평창 한우를 꼭 먹어야 한다는 성인 넷과 의견이 또 갈린다.

술이 한잔 들어가니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하나씩 쏟아내며 우리의 여행은 익어간다.

잠이 안 와 휴가지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선정 이달의 최고의 책이란 광고를 하길래 지난번 인터넷에서 주문한 후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이다. 9편의 단편 소설 중 '세상 모든 바다'와 '보편 교향'은 얼마 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이다. 이중 오늘 소개할 소설은 '롤링 선더 러브'다. 우리 집 두 남자들이 즐겨보는 <나는 솔로>를 모티브로 했다. 읽는 내내 남들 연애에 들떠있던 b와 b의 미니미, 부자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재미를 더했던 소설.

휴가지에서 가볍게 읽기 좋았다.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결심한 소설 주인공의 심리 묘사부터 출연자가 아닌 PD를 마음에 그녀의 심리적 동선을 따라가며 실제 이 프로그램에 나왔던 일반인들의 연애를 상상해 본다.

김기태 작가의 글 속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들. 내 남편과 아들이 공감했던 <나는 솔로>의 이야기를 비롯해 내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 시대의 단상을 극적이기보단 무심하게 풀어내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시대를 향한 비판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각박하고 바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기 주변에서 결혼 상대자를 찾지 못해 공개 연애 프로그램에 나서는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웃픈 현실이다. 실제 작가의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빅마마의 <체념> 등으로 짐작건대 작가는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X세대가 아닐까 추정된다.

위로는 베이비붐 세대와 아래로는 MZ세대 속에 낀 세대인 X세대의 감성과 고뇌를 잘 알고 있는 작가 김기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1980년생인 내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한 번쯤은 고민하고 고뇌했었던 삶의 한 부분들이 소설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일요일 새벽 6시 강원도 경포대의 작은 호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 글을 쓰고 있다.

강원도까지 멀리 떠나 온 김에 예정에도 없이 하루 더 있다 가자는 나와 b의 제안에 여섯 명 중 우리 부부만 남았다. 여행보다는 집에서 친구들과 게임 한 판이 더 소중한 아들과 수영장이 없는 숙소라면 그냥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빈둥거리는 게 더 좋다는 사춘기 남매는 어제 부모님과 집으로 갔다. 급하게 방을 잡았다.

결혼 이후 단 둘이만 있어보긴 처음이다. 단 둘이 있으면 엄청 신날 줄 알았는데 경포대의 밤바다를 거닐면서도, 회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면서도 우리 부부는 가족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나이가 드신 부모님, 품 안에서 조금씩 독립적으로 떨어져 가는 아이들,

그리고 마흔 중반이 된 b와 나.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밤바다를 걸었다. 마침 여행지에 온 사람들이 쏘아 올린 폭죽이 바다를 수놓는다. 축제의 시간. 모처럼 b와 난 <나는 솔로>에 나오는 영호와 영숙처럼 설레었다. 예전처럼


이전 27화 <언제나 책봄> 김훈의 '허송세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