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주연배우, 그 이름은 이정길>

by 성대진


KBS PD협회장을 지낸 고찬수 PD는 제 고교 동문입니다. 현재도 재직 중입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거꾸로 제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주연배우는 주연만 하는가!’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 주연배우는 주연배우로 태어나는 거야! 모든 배우는 주연을 하고 싶어 해. 그러나 주연배우는 마스크가 돼야 하고, 카메라 앵글에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어야 해. 대사처리에서 발성과 호흡은 당연히 기본이지. 야구에서 4번 타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4번 타자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보면 돼.


007시리즈의 주연배우인 본드 역은 숀 코네리에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그리고 다니엘 크레이그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작진이 격론을 반복하고 1년이 넘게 캐스팅이 표류됐던 무수히 많던 사연은 주연배우의 중요성을 웅변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주연배우는 간판입니다. 그래서 주연배우의 캐스팅은 성패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주연배우는 일단 ‘주연급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100년이 넘는 영화사를 살펴봐도 주연배우는 ‘주연급 배우들’ 중에서 캐스팅하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외모만 출중해서는 주연배우로 등극하기 어렵습니다. 단박에 시청자나 관객을 사로잡는 매력을 품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연배우가 괜히 돈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배우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연배우로만 일관한 이정길의 괴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주현과 한진희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주연배우에서 주조연급으로 한 걸음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이정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 2자는 주로 멜로물에서 두곽을 보였지만, 이정길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었기 때문입니다. 이정길은 MBC의 간판 사극인 ‘조선왕조 500년’에서 이순신으로 활약하다가 갖바치로 열연을 보였습니다. 그 이전에 ‘암행어사’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암행어사로도 활약했습니다. 사극, 시대극, 멜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주연만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연기력, 외모, 그리고 시청자들의 호응을 모두 얻은 결과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rV--b6iNhw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할머님은 이정길이 TV에 나오기만 하면, ‘쟤는 맨날 연애만 하는구나!’라고 장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전 1970년대는 노인들이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하지 못해서, TV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드라마 속 현실이 배우들의 실제 생활에서도 같다고 믿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어리숙한 시골노인들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정길이 멜로드라마로 인기가 뜨거웠을 때에도 청소년 드라마 ‘제3 교실’에서 이효춘과 더불어서 제자를 사랑으로 감싸는 열성 교사로 분하여 열연을 하였습니다. 당시 문제아로 단골로 출연한 배우가 바로 이계인이었는데, 이계인은 ‘수사반장’에서는 강도나 폭력배로 출연하고, ‘제3 교실’에서는 문제아로 출연하는 비애(?)를 겪었습니다. 물론 할머님은 이계인만 나오면 혀를 차시곤 했습니다.


연기력이 출중한 데다가 시청자들이 워낙 선호하기에, 이정길은 겹치기 출연이 일상이었습니다. 이정길이 나오면 기본 시청률이 보장되는데, 드라마 제작진이 이정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를 보다 보면, 그 시절 이정길이 겹치기 출연이 불가피했던 사정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겹치기 출연을 했으면서도 배역에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연기력은 물론 집중력이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역에 녹아야 가능합니다. 이정길 스스로도 뼈를 깍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다양한 배역에서 성공한 배우입니다. 이정길은 우리 시대의 명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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