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일지 1.

지옥에서 (1)

by 늦은구름

사자의 채근을 들으며 힘들게 걷고 또 걸어서 시왕전에 다다랐고, 큰 문에서 검문을 받은 다음 화려하게 채색된 건물 앞으로 갔다. '제5관'이라 쓰인 가로로 된 현판이 높직이 걸려 있었다. 사자는 지운을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판결을 기다리는 영혼들로 실내가 가득 차 있었다. 지운은 사자의 지시에 따라 대열의 끝에 섰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벼라 별 영혼들이 어깨가 축 처진 채 자기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가 굽은 백발노인부터 팔팔한 젊은이까지 이유야 어떻든 죽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염라대왕 앞에 불려 간 영혼들을 이승에서 한 일과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하도록 판관이 닦달하는 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염라대왕은 업경대를 보고 불려 온 영혼을 비추어 보며 생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하라고 엄하게 문초하고 있었다. 판결을 받은 자는 관리들의 손에 어디론가 이끌려 나갔다.

말을 안 하거나 한 말이 거짓인 듯하면 큰 거울 앞에 서게 했는데, 그 거울은 생전에 이승에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거짓이 드러나면 염라대왕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엄벌이 주어졌고,

거짓말에는 더 엄한 벌을 내렸다.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 자, 부모를 죽인 자, 자식을 돌보지 않아 죽게 한 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만든 자, 힘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괴롭힌 자 등등 죄의 종류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았다. 처분에 항의하다가 경비에게 몽동이로 얻어맞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애걸복걸하며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자도 있었다. 그에겐 몽둥이가 답으로 돌아갔다.

지운은 판결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여러 영혼들의 판결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나 저 제나 차례를 기다리던 중에 차례가 돌아왔다. 이름을 대라는 서기의 말에 이 지운이라고 대답한다. 서기는 서류를 여기저기 뒤적여 보더니 다시 묻는다. "이름을 말하여라."

지운은 다시 자기의 이름 석자를 말하였다. 서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런 이름은 없다. 저쪽에서 기다리거라."

지운은 한쪽 귀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분만을 기다리다가 한 서기에게 자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으니 다른 서기에게 가서 알아보고 와서는 지금 알 수가 없다고 한다는 말만 들었다.


저승에서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있구나 속으로 뇌까리면 '그렇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게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밀려오는 영혼들이 하도 많아 염라대왕과 판관 서기들도 바빠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염라대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서기들도 서류를 정리하더니 경비들에게

지시하였다. "미 판결자는 대기실로 보내도록 하라."

경비들은 대기 중인 영혼들을 다른 방으로 보냈다. 지운은 경비에 떠밀려 판결이 확정된 영혼들에 휩쓸려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사진 길을 내려가게 되었다.


지운은 경비에게 "나는 아직 판결도 받지 않았습니다."

항의해 보지만 경비는 지운을 무리에 밀어 넣어 버렸다. 별 수 없이 내리막 길을 걷고 걸어서 큰 문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험악하게 생긴 문지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큰 문을 열었고, 지운을 포함한

무리는 문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문 안쪽에는 어둠뿐, 넓이와 거리를 알 수 없었다.

들어가고 나서 여기가 지옥이라는 걸 알 게 되었다. 무리가 들어가자 문은 바로 굳게 닫혔다.


이렇게 하여 지운은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희미한 빛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깜깜하기만 한, 무얼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영혼끼리 부딪치고 올라타고 밟고 아우성이었다. 보이지 않으니

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져서 상황을 판단한다. 지운도 밟히고 떠밀리고 가까스로 일어나면 다시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시간이 꽤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때에 조금씩 영혼들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건 그림자 같은 거무스름하고 후줄근하며 축 처진 몰골들 뿐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었다. 옷은 찢기고 드러난 몸뚱이는 긁힌 듯 상처

투성이었다. 얼굴들은 창백할 것이며, 눈은 핏발이 서 있어서 쳐다보기조차 끔찍하였다.

지운은 자신도 남이 볼 때엔 저들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은 쑤시고 아팠다. 감각은 계속 살아있는 것인가 보다. 암흑, 그 안은 서로 당기고 밀치고

주먹질하고 들이받고 하는 싸움터였다. 그 속에 지운은 내 팽개쳐진 신세였고,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힘이 없으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새로 들어간 무리는

경사가 진 바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계속 가게 되었고 가는 동안 주변으로부터 욕설과 폭행을

당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흙탕물에 맑은 물이 흘러들어 갈 때처럼 처음엔 구분되다가 섞여서 어느덧

큰 무리에 흡수되었다. 거기에 개인의 의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무시되고 억눌렸다.

어둡고 악취 심하고 험악한 세계였다. 보이지 않고 아프고, 그래서 괴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지운은 오늘이 며칠인지 안 수도 없이 그저 지쳐 쓰러져 있었다. 시간을 알려는 것은 사치 아니 허황된

것일 뿐. 주위엔 고통에 신음하는 영혼들만 가득하였다. 지운은 고통이 증폭되는 걸 알면서도 몸을

움직여 본다.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 가는 내 혼백마저 으스러져 없어질 것 같았다.

'지금 죽어 있는 건데 없어진 들 뭐가 대수 냐'고 물어보면서도 한편으론 끝을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떻게 흘러가든 상황은 정해진 대로 움직일 것이니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지운은 지옥에 오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를 더듬어 본다. 참으로 신기하다. 지옥에서도 생각은 할 수

있다니. 이런 현상은 죄를 뉘우치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여력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천천히 생각해 보자. 살아생전에도 죄라는 것에 관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리 심각하게 해보진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줒 않고 사는 것. 이것이 평생을 살아온 방향이었다.


젊어서 월남에 파병되어 무더운 곳에서 험한 꼴을 보아가며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

하였고, 젊음이라는 힘으로 버티고 고통을 당해도 금방 털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군생활을 더 하다가 전역하여 처자식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았다. 지운의 세대가

대개 그렇게 살았다. 그 과정이 특별할 것이 없지만 되돌아보면 그 시절 남들처럼 정역을 일에 바치고

작은 이해관계는 가볍게 넘어가는 대범함도 있었다.


별로 똑 꼭하지는 못하지만 공부머리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높은 벽이었다. 그때의 내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았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 만을 자책하였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였다. 일 찌기 어려서부터 자신의 가능성에 전력을

다하여 결과를 획득하자는 희망을 포기하는데 익숙하였다.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운의 깊은 상념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다. 자기가 괴로우면 남에게 해코지하여 화를 푸는 자

들이었다. 지운에게 다가와서 발로 차며 으름장을 놓는다. 하는 수 없이 일어선다. 간신히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여겼더니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해하는 자의 행위는 자기를 내세우고 싶은

폭력적 의식이 몸에 뭉쳐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살아 있을 적엔 조폭이었을 것이다. 주먹을 휘둘러

힘을 과시하던 버릇이 여기 지옥에까지 남아 있나 보다.


지운이 생전에 혐오하던 존재들이었는데 여기서도 그 꼴을 보게 되니 위협이 되어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났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힘이 없는 것은 죽어 영혼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는

얼마든지 두들겨 패 주고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 건 생각뿐, 지운은 몇 차례 더 맞아서 쓰러지고 말았다.

어떤 일이 일어난 들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화이 힘들고 서러웠다.

이때 주위가 신음소리와 함께 웅성 웅성 하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둡고 우중충한 광경뿐이었다.

왜 웅성거릴까 하고 거듭 둘러보니,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사람 크기보다 조금 크게 보였는데

형광등 같기도 하고 멀리 안갯속에 보이는 등불 같기도 했다. 영혼들이 놀랄 만했다. 암흑의 이 공간에

희미한 빛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사람들에 가려서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빛이 나는 물체에 몰려들었다.


지운도 관심이 생겨 그쪽으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시도였다. 어마어마한 무리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전에도 군중 속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터에 지금 새삼스럽게 저

성냥통 같이 밀집한 군중 속으로 무엇을 찾아, 사력을 다해 가야 하는 것이라면 싫었다. 관심과 포기

사이에 잠시 갈등한다. 거기에서 무얼 찾으려 한단 말인가? 자문해 본다. 그저 남들이 아우성치며

몰려드니 나도 한 번 해보자는 것인가? 아니다. 관심은 가지되 싸우며 목표에 달려드는 건 삼가자.


무얼 얻겠다고 허우적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 참을 희미한 빛이 움직이는데 차츰 밝아지는 것과

무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그 움직임은 지운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엔 검은띠로 된 모자를 쓰고 오른손엔 멋있는 지팡이를 잡고 있으며 왼손엔 금륜을 들고 있었다.

공중부양을 하여 조금 더 가더니 멈추었다. 머리 뒤에는 광배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그러자 사방의 벽에 고정되어 있던 횃불이 켜졌다.


횃불은 저 광배가 빛나는 인물에 의해 켜진 것 같았다. 지운은 속으로 감탄하며 경이로운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굉장한 능력을 사진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지장보살님'

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저분은 아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지운도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경을 읽어

보아 지장보살이라는 호칭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불상을 볼 때 자세히

보지 않고 건성 보고 넘어갔으니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불경이라면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을 뿐 다른

것은 몰랐다.


반야심경을 외운다 해도 심오한 내용과 이치를 깊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꾸 외우니까 외워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에서 지장보살을 직접 보다니 지운에게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결코 볼 수 없는 기막힌 행운이었다. 이 기회에 자세히 보리라 마음먹고 발끝을 돋우어

바라본다. 저절로 합장하는 자세가 되었다. 지장보살이 이윽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내 말을 들어 보아라. 나는 이 지옥을 관장하고 있는 지장보살 이니라.


여기 지옥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대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치 못하고 눈물이 나와 견디기

힘이 든다. 나는 늘 그대들이 전생의 죄를 뉘우치고 밝은 세상에 나갈 수 있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느니라. 나는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서원하여 지옥의 중생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노라고 말씀드리고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부처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이 세계를 책임지겠노라고

서원했느니라.


참회하라 거듭 참회하라. 참회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을 왜 모르는가? 그대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부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전의 죄를 뉘우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니. 이 지옥을

나간 영혼들도 많이 있도다. 나가지 못한 영혼들은 못 나간 이유가 있으니, 참되게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로다. 거짓은 나에게 또한 모든 세계에서 통하지 않느니라. 참으로 뉘우친 자 들은 내가 알고 있느니,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나 지장보살은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노라.

여기 지옥에서 나가려면 참된 마음으로 뉘우치고 주변을 새로운 마음으로 둘러보라. 무엇이 보이겠는가?

그대들의 마음이 참이라면 밝고 평화로운 세계가 보일 것이다. 내가 약속하건 대 마음이 편안한 영혼

이라면 충분히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이니라.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욕심을 버려라'하고 설법하셨느니라. 옆사람에게 잘하라. 그리하면 결국엔 그대들 자신에게 행복이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나 지장보살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중요한 존재 이니라.


거듭 말 하거니와 뉘우치고 또 뉘우쳐서 밝은 해를 볼 수 있는 세상에 나가길 기도 하겠노라. 내가 나갈

때에 내 뒤를 따라 나갈 수 있는 영혼은 뉘우친 자이며 광명을 찾을 자격이 있는 자 이니라."


지장보살의 설법이 끝나자 여기저기 한숨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각자 자신의 처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누가 나가는지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당장 뉘우치는 마음의 자세는

뒷전이었다. 지운은 조금 전까지 과거를 회상하던 차에 지장보살의 설법을 듣게 되었는데, 자기는 아직

나갈 자격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리저리 떠밀리고 밟히고 넘어지는 와중에 생전의 일을 뉘우칠만한

시간이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기회는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지장보살이 출구 쪽으로 가자 많은 영혼들이 뒤를 따랐다. 한꺼번에 몰리니 밀치고 넘어지는 자가

많았다. 따르던 무리는 아우성과 함께 크게 움직이더니 지장보살이 안 보이게 되자 비명과 울부짖음이

섞인 고함이 지옥의 천정에 울려 퍼졌다. 벽에서 타고 있던 횃불은 입구 측에서부터 하나씩 꺼졌다.

모든 영혼들에게 희망이었던 시간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운은 생각하기를 이 많은 영혼들이

지장보살 법문대로 과거의 죄를 뉘우치면 여기를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정말 나갈 수 있는 것일까?


한 편으로는 여기 지옥에 떨어져 있는 사실이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니 그리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상에 비유한다면 옥살이하는 사람이 죄를 깊이 뉘우치고 수감생활이 모범일 때는 사면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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