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침묵이 얼어붙은 시간의 끝에서
나는 봄이라는 존재의 증명을 기다립니다
낡은 외투 깃을 세우던 날 선 바람이
어느덧 제날을 무디게 갈아
앙상한 가지 끝에 머물러 쉴 때
겨우내 빗장 걸어두었던 내면의 문을
손끝으로, 아주 천천히 밀어 엽니다
아직 형체도 없는 생명의 예감이
발 아래 어둠 속에서 첫 맥박을 뛰고
나의 기다림 또한
한 줌 햇살에 제 존재를 묻습니다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봄은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그 최초의 전율이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인내의 시간을
마침내 의미로 되살릴 때까지
견딤이란, 그러므로
사라짐이 아니라 익어감이었습니다
겨울이라는 심연 속에서
나는 나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고
이제 그 문턱에 서서
가장 먼저 피어오를
나 자신이라는 생명을
경건히 예습합니다
<글쓴이의 말>
이 시를 쓸 때, 저는 긴 겨울을 보내며 느꼈던 고요하고도 절박한 기다림을 담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겨울 같은 시간을 지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간 들.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자꾸만 조급해졌습니다. 언제쯤 봄이 올까, 언제쯤 내 삶에도 변화가 찾아올까 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겨울이 단순히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씨앗이 땅속 어둠에서 발아를 준비하듯, 저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던 거죠. 견딤이란 소극적인 인내가 아니라,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는 그런 깨달음에서 얻은 깨우침입니다. 봄을 기다리면서도, 사실은 제 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요. 겨울이 저를 가르쳤습니다. 진짜 봄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 고요한 시간을 통과한 내면에서 피어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나 자신이라는 생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기다린 것은 결국 외부의 변화가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날 저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겨울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이 시가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