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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Garden Sep 26. 2022

서울 교통을 잊은 커플에게는 예약이란 없다.

시작은 엉망이지만, 그 끝은 꽤 괜찮았다.

서울 교통을 잊은 커플에게는 예약이란 없다.


여자 친구에게는 두 개의 명절이 있다. 자신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그날은 긴 기획 기간을 거친다. 오랜 기간 회의를 하기도 하고, 다된 기획을 엎기도 한다. 그 자체가 이미 재미있는 일이 된다.


올해의 기획의 주제는 '체험'이었다. 우선 일 년에 한 번,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파인 다이닝 (fine dining)을 가는데, 생일이 그날로 정해졌다. 다음 일정으로는 도자기 만들기 체험. 소비만 하는 날이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체험이다. 생산자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에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마지막으로 갤러리. 문화를 체험하자는 의미로 넣었다.


그렇게 선정된 곳은 'Room 201', 'AA 세라믹 스튜디오', '의외의 조합'이었다. 파워 계획형인 나는 모든 일정이 빈틈없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영화의 클리셰처럼, 안심한 녀석이 먼저 죽는다. 


서울로 진입하는 데다, 강을 건너가야 하기에 일찍 나섰다. 2시간 미리 출발했다. 나는 과거에서부터 배운 일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이 말을 바꿔 그때의 나에게 하고 싶다. 


"서울 교통을 잊은 커플에게는 예약이란 없다."


양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여유 있던 1시간은 점차 줄어든다. 조급해졌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침착한 여자 친구는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어 늦을 거라는 통보를 했다. 괜찮다고 한다. 


이후 30분이 흘렀지만 아직 한강을 건널 다리도 보지 못했다. 30분 지각이 확정되었다. 다시 전화한 레스토랑에 더 늦을 것 같다고 하니, 조심히만 오라는 응답이 왔다.


막히는 한남대교가 아닌 반포대교로 우회했다. 자 이제 다 왔다. 안심이다. 뻔한 클리셰의 반복이다. 마지막에 안심한 녀석도 죽는다. 남산 2호 터널과 3호 터널은 다른 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Room 201 도착한 시간은 예약 시간보다 40분 늦었다.




파인 다이닝은 절차가 있다. 절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식사 시간은 1시간 30분 내외. 계산해보니 도자기 만들기 예약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예약한 애플리케이션에서는 취소와 변경 따윈 절대 안 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붉은색에 굵은 글씨로 경고해놨다. 안. 된. 다. 고.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선생님은 다음 시간에 4명 예약이 있는데 그때 같이 해도 되냐고 물어봤다. 무조건 된다고 소리쳤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음이 안정되니 이제야 음식과 레스토랑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정갈하고 조용했다. 동요하던 내 마음은 이제야 안정이 되었다. 여자 친구는 동요 없이 나를 지켜봐 주었다. 


룸 201에서 나온 음식


다음 일정인 도자기 만들기 체험.  가게에는 주차자리가 없다는 경고에 산 아래에 주차를 하고 올라갔다. 그야말로 등산이었다. 


경사로



도자기 만들기 체험


도착한 가게에는 친절한 선생님이 계셨다. 안내에 따라 1시간 흙을 만지니 접시가 완성되었다. 거기에 이니셜까지 넣으니 뿌듯했다. 도자기는 한 달 후에 수령이 가능하다는 말에 나는 여자 친구에게 "한 달 동안 잘 지내자"라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크리스마스에 만드시고 안 오시는 분도 많으시고, 혼자 오셔서 만든 도자기를 깨고 가시는 분도 있다는 살벌한 말을 웃으시며 하셨다. 정말 그런가 보다.



의외의 조합


마지막 일정인 의외의 조합.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층에는 카페 이층에는 갤러리 삼층에는 탁 트인 루프탑이 있었다. 세명의 작가 작품이 전시되어있는데, 돌아보곤 둘 다 하나의 사진에 꽂혔다. 여기서 이게 제일 좋다. 여자 친구는 웃으며, 이제 취향까지 닮아간다고 한다.


생일 기획이 그렇게 끝났다.


시작은 엉망이었지만, 그 끝은 꽤 괜찮았다.


여자 친구에게 고맙다. 일정의 시작이 엉망이 되어 멘털은 바스스 부서졌다. 하지만, 차분히 일이 되길 기다리는 그녀 덕에 그 끝은 꽤 괜찮았다.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냐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안달복달한다고 도로가 뚫리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일정은 조정해보면 되지. 사람 사는 일에 사람이 조정하지 못할 일이 있나? 안된다면 다른 것 하면 되지. 우연이 한일이 더 재미있을지 누가 알아?"


그녀의 말은 내 마음을 쾌청하게 했다.


시작은 엉망이었지만, 그 끝은 꽤 괜찮았다.



P.S.

도자기를 찾을 때까지 여자 친구와 잘 지내야겠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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