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
봄맞이로 대형 미술관부터 인사동의 작은 미술관들까지 전시 기획이 한창이었다. 다음날 나는 “봄에 볼 만한 전시회” 라는 기사를 쓰다가 취재를 핑계 삼아 사무실을 나와 12시쯤 경찰서로 향했다.
“도무지 말을 안 해요. 피의자 조서를 쓰려 해도 뭘 알아야 쓰지.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한테 불리할 텐데. 담당 검사는 대충 조서 꾸며서 넘기라는데……. 자백 말고는 딱히 동기도 증거도 없으니. 그런데 이상한 게 현경수는 형제자매 하나 없는 외동아들이었고, 일가친척 하나 없던데 어째서 아이가 조카라는 거야? 8년 전 어머니마저도 세상을 뜨고 아이를 입양하기 전까지 줄곧 혼자 살았더라고.”
형사는 답답한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치며 말했다.
“그래요?”
나는 문득 고등학교 시절 경수의 집에 갔을 때, 대학생 누나가 있는 걸 본 것이 기억났다. 지금도 그걸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는 건 경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투명해서였다. 아니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누나, 내 친구야.’ 그녀는 경수의 말을 못 들은 양 유령처럼 흘러 들어가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때 당황했지만 경수는 닫힌 방문을 두드리며 방 안에 있는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우리 라면 끓여 먹을 건데 누나도 끓여 줄까?”
방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누나가 좀 까칠해.”
경수는 내게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살짝 웃음 띤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한 후 주방으로 가는 경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마침 점심때라 강력반에는 형사들이 많지 않았다. 면회실로 안내한 담당 형사는 이신희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갔다. 면회실 유리창 너머의 그녀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었다.
“Y사 정선욱 기자입니다.”
“기자님이 무슨 일이죠? 형사님께 다 들었을 텐데.”
이신희는 심상하게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도 차가운 바깥바람에 점퍼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던 나는 도자기 인형처럼 표정 없는 그녀 앞에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신희에게 말을 건넸다.
“저, 경수 친굽니다.”
이신희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낯설지 않았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눈빛은 18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다시 한 번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나와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라곤 없는 이신희가 말을 꺼냈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기자 생활 4년 동안 살인 사건 용의자를 처음 대면해서인지, 아니면 용의자가 이신희라서인지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 말했잖아요. 그날 나는 우리 애를 보러 갔었고, 경수랑 다투다 그랬다고.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게 이유란 말입니까? 더구나 이신희씨 말대로 경수는 동생이라면서요. 둘이 사이가 나빴다면 왜 아들을 경수에게 맡겼죠? 경수가 동생이 맞긴 맞는 건가요?”
나는 봇물 터지듯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냈다.
“당신이 뭐가 그렇게 궁금하죠? 기자면 다인가요? 자극적인 기삿거리 만들어 조회 수 올리는 거, 그게 기자님들의 임무 아닌가요? 어떻게 말해 드릴까요?”
이신희는 조용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그녀의 의외의 태도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전에 이신희씨를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경수의 친구라니 봤을 수도 있겠네요.”
이신희는 체념한 듯 말을 이어 갔다.
“알고 계시는 대로 경수는 괜찮은 아이였어요. 그 아이가 저와 피를 나눈 진짜 동생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