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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신화

예술가가 원하는건 방임이 아니라, 감각 있는 개입- "지원하고 협력하자"

by 성희승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취임 이후 문화예술 정책의 기조로 내세운 이 한 문장은, 그 자체로 시대를 바꾸는 선언이었습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당시 문화예술계는 여전히 5공, 6공 시절의 유산인 검열과 통제의 그림자 아래 있었고, 민주정부가 보장한 표현의 자유는 혁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말은 분명 필요한 약속이었죠.

이후 문화예술진흥기금, 문예진흥법 개정, 문화예술위원회의 독립화 같은 제도적 진전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요.

그 문장은 너무 오래, 너무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심지어 본래의 취지는 왜곡되고, 예술가를 고립시켰으며, 누군가에겐 착취의 구조가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나는 그 말을 너무 자주 들었습니다.

“예술가니까 몰라도 돼요.”

“예술은 행정이 아니니까요.”

“자유롭게 하세요, 저희는 간섭 안 합니다.”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도록 돕는 비창작의 영역, 즉 경영, 법률, 기획, 회계 같은 부분에서의 전문적이고 감각 있는 개입이 필요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간섭받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영역은 ‘간섭’이라는 단어에 함께 묶여 무관심과 방임의 구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은 점점 무책임한 방임의 방패가 되었고, 공공성과 투명성이 실종된 예술단체들에겐 면죄부처럼 작용했습니다.


그 결과,

예술가들은 여전히 약자이고,

어떤 협회와 단체는 작가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를 ‘통제’하는 구조가 되었고 기득권의 울타리로 변했으며,

현장의 문제는 개선되지 않은 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예술가의 표현을 간섭하지 마세요.

하지만 예술가들이 ‘간섭을 필요로 하는 영역’을 외면하지도 마세요.


감각 있고 전문적인 개입,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만드는 진짜 시작입니다.


‘작가’는 왜 ‘경영’을 몰라야 할까, 창작의 반대말은 행정이 아닙니다.


왜 작가는 계약서에 약하고,

왜 작가는 협회를 믿지 못하며,

왜 작가는 행정과 네트워크에 늘 소외되는 걸까요?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지속 가능하려면, 이제 ‘비창작의 능력’을 구조적으로 지원하고, ‘작가’라는 직업이 왜 회계, 기획, 조직 운영에 유난히 취약하게 방치되었는지, 그리고 그 허점을 어떻게 누군가는 기득권의 통로로 활용하고 있는지, 함께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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