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지우개
영원히 슬픈 지우개
어느 새가 아니라 겨우겨우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취업이냐 대학이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둘 다 가르칠 수 없다는 엄마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나는 재수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나는 나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호의호식하면서 풍족하게 학교를 다니는 조카와 달리 나는 두세 개의 알바를 하고 회수권 살 돈으로 밀가루를 샀고, 발가락이 보이는 실내화를 신어야 했다. 형부들에게 학비를 받기위해선 성적도 우수해야 했다. 언니들이 눈치보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학력고사를 앞둔 어느 날 밤 막차를 타고 엄마가 조금의 양식을 챙겨서 내 자취방에 오셨다.
등록금 이야기를 할 절호의 기회다 싶어서 간단하게 밥을 챙겨드리고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입학금만 도와주세요 "
" 아니 빌려주세요 "
" 이번 한 번만 저 좀 봐주세요 "
" 꼭 대학 가고 싶어요 "
" 입학금만 해 주시면 그다음부턴 제가 알아서 다닐게요 "
" 엄마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엄마는 요지부동 안된다
없다 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 니 조카 가르치기도 힘들다 "
" 대학 포기해라 "
" 그냥 취직해서 돈이나 벌어라 "
조카는 부모가 없는것도 아닌데, 왜 할머니가 손자 가르친다고 딸 자식을 외면하는지 ,,,
밤새 꿇은 건 무릎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첫차를 타신다고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서 자취방을 나서는 엄마가 나는 또 애처로워서 만원을 차비 하시라고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며칠이 지나서 엄마가 다시 오셨길래 도와주실 모양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저녁상을 차려드리고 다소곳이 앉아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다리는데 엄마는 내 마음에 또 말뚝을 박으신다.
얼마 전에 차비로 준 만원 네가 줬다 하면서
조카한테 주니까 고맙다 전해달래고 했단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지, 나는 그 순간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눌러 참아 삼켰다.
회수권 살 돈도 없어서 걸어 다니고, 멀건 수제비국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간신히 모아놓은 돈에서 엄마 차비라도 하시라고 드린 건데, 그 돈을 조카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엄마 얼굴을 멀건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밤새 무릎 꿇고 입학금이라도 해달라는 딸의 마음은 외면하고, 내치고, 팽개치신 분이 그 딸년이 어찌 번 돈인지도 모르면서 그걸 손자한테 주시는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혼자가 되고 아들 키우면서 엄마까지 모시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내게 미안했다고 말씀하시는 엄마를 대하면서 나는 또 목이 아프고 열이 난다는 걸 느꼈다.
" 그때 네가 그렇게 대학등록금 해달라고 할 때 못해준 게 너무 미안했어.
그때 내가 해줬으면 지금 이 고생 안 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에미가 면목이 없다. "
왜 이제서 왜 이제 와서 차라리 잊은 척 아무 말씀 하지 말지 왜 지금 그런 말로 아물어가는 상처는 또 들춰내시는 건지
지우고 싶은 지난 시간들을 어떤 지우개로 지우라는 건지, 원망도 미움도 아닌 답답함이 내 심장을 움켜잡고 통째로 뜯어내는 고통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귀하디 귀한 손자는 할머니를 무시하고 안부전화 한 통 없고 겨우 명절에나 빼꼼 얼굴 보여주는데 나는 왜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있는 걸까?
삶이 아무리 정해진 수순도 없고, 정답도 없고, 알 수 없는 것들의 집합체라지만 내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귀한 자식들은 다 나 몰라라 하는 엄마를 나는 13년을 모시고 살았다.
인생의 저울은 언제나 내 편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으면서 말이다.
엄마가 없어야 내가 산다고 믿었다
엄마가 없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어야
내가 산다고 믿었다
엄마가
없
어
야
지
내가
숨을 쉴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는
지금
엄마
엄마
나는 매일
엄마를
부른다
그런 엄마여도
그 냄새가 좋아서